항목 ID | GC08101201 |
---|---|
한자 | 松林里韓紙-將軍- |
이칭/별칭 | 송림리 장군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김경환으로부터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5년 -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송림리 장군듬」이라는 제목으로 『경산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송림리 장군듬」이라는 제목으로 『경산문화대사전』에 수록 |
관련 지명 | 장군듬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 |
채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1리 |
성격 | 지명 유래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송림사 스님|마을 사람들|한 장군 |
모티프 유형 | 스님의 도움|장군수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 있는 송림사와 장군듬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은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 있었던 송림사와 관련한 한지 생산에 대한 이야기와 장군듬의 명칭에 관한 유래를 담고 있다. 송림리는 송림사 스님에게 한지 생산을 배운 덕분에 부촌이 되었고, 또 누구도 뚜껑을 열 수 없는 신성한 곳인 장군듬이 있다는 점에서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와 채록 장소는 명확하지 않다. 2005년 대구대학교 부설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송림리 장군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2년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1리 김경환[남, 당시 68세]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2009년 경산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경산문화대사전』에 같은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다. 이렇게 송림리 장군듬에 대한 서로 비슷한 이야기가 두 곳에 수집되어 있어 서로 보완하여 볼 수 있다.
[내용]
송림리는 용성면 구룡산 아래 위치해 있으며 용성면 내에서 호수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개척 당시 마을 언저리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하여 ‘송림’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마을 개척 이전에 마을 동북쪽에 신라 때 창건한 송림사라는 큰 고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큰 화재로 이 절은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당시 절터는 송림지와 송림댐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일제 때 송림지를 준설하면서 사찰 석조물을 송림지 제방 축조에 사용하였으므로 이후 절터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송림사가 불타자 그 절의 부처님 불력으로 남은 사찰건물이 지금의 칠곡군 소재 송림사로 갑자기 옮겨졌다는 전설도 있다. 송림사가 있던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 외에도 자연산 닥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송림리를 개척하던 시기에 송림사에 거처하던 한 스님이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구한말까지 이 마을은 영남권에서도 빼어난 한지 제작 마을로 알려졌다. 스님의 한지 제작 기술을 이어받은 송림리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지 제작에 종사하게 되어 한때 용성면에서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송림리에서 500여m 위쪽에 ‘큰 듬’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큰 돌무더기가 쌓인 곳으로 둘레는 널찍하고 위에는 삿갓 모양의 큰 뚜껑이 있으며 한겨울에 흰 눈이 내리면 이 일대에는 김이 속아 오르며 더운 열기로 인해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내부에 장군수(將軍水)가 있어서 누구나 이 물을 마시기만 하면 장군이 된다고 한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그 뚜껑을 열려고 했으나 열지 못하고 돌아갔다. 원래 송림리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민간 토속 신앙이 있는데 이가 곧 ‘한장군’ 신앙이다. 한장군은 자인면에서 발원한 전설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산에 조그마한 사당을 짓고 해마다 오월 단오날에 온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한장군제를 올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지시로 이 뚜껑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뇌성이 치고 큰 비가 내리는 등 하늘이 울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모두 피신하였다고 한다. 일제 때 단오제가 일시 중단되자 마을 앞 한장군 사당은 폐허가 되고 주변의 칡덩굴이 사당을 에워싸고 후일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장군 추앙당시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주워 모았던 돌무더기와 칡덩굴은 현재까지도 무성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장군듬’이라고 부르며 감히 근접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돌 듬 아래에는 깊은 샘이 있는데 그 샘을 ‘무지개 샘’이라고 하며 비가 올 즈음이면 이곳에서 무지개가 아름답게 피어오른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설화의 모티프는 ‘스님의 도움’과 ‘장군수’이다. 송림사 스님의 도움으로 부촌이 된 마을 송림리의 이야기는 불교가 마을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스님의 도움은 인과응보적인 경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설화에서 마을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겉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기 마을 사람들의 선량함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장군이 아닌 사람은 마실 수 없는 장군수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분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장군수는 그 지방의 특정한 장군의 것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송림리의 장군듬은 한장군의 장군수에 대한 이야기로 마을 토속 신에 대한 숭배를 보여준다. 또한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열려고 했으나 열 수 없었다는 후일담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