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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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夢紀 |
영어공식명칭 | Jang Monggi |
이칭/별칭 | 척재(惕齋),비유장군(飛孺將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장몽기(張夢紀)[?~1613]는 임진왜란 때 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가계]
장몽기의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척재(惕齋)이다. 장몽기의 인동 장씨는 태사(太師)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都始祖), 대제학(大提學) 장계(張桂)를 중시조로 하며,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을 파조로 삼고 있다.
[활동 사항]
장몽기는 경산 출신으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란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에 1592년(선조 25) 전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곽재우(郭再祐)·최동보(崔東輔)·조성(曺珹) 등과 함께 창의(倡義)한 후 향병(鄕兵)을 모집했다고 한다. 전란 중 장몽기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비유(飛孺)’라는 호를 하사하였기에 깃발에다 ‘비유장군(飛孺將軍)’이라는 표시를 하였다. 대구의 화담(花潭), 경주의 모량(毛良), 영천의 당현(唐峴), 고령의 무계(茂溪)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또 경상도 관찰사를 따라 대구에서 왜적을 토벌하기도 했다. 여섯 날 사이에 여덟 번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함창(咸昌) 당교(唐橋)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몽기는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1814년(순조 14) 사림이 청원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