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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유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574
한자 風詠亭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승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9년 1월 30일 - 「풍영정 유래」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마을에 거주하는 김용팔의 이야기를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풍영정 유래」 『광주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풍영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풍영정길 21 지도보기
채록지 풍영정마을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855번지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전설
주요 등장 인물 김언거|갈처사
모티프 유형 건물유래|일화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영정에 관한 이야기.

[개설]

「풍영정 유래」풍영정(風詠亭)의 현판과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1503~1584]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9년 광산구 신창동 풍영정마을에서 김용팔[남, 74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풍영정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극랑강(極樂江) 상정의 절벽 위에 있는 정각(亭閣)으로, 광산김씨(光山金氏) 칠계 김언거가 세웠다. 당시 임금이었던 중종(中宗)[재위 1506~1544]이 이를 치하하면서 김언거에게 전라도 무주 구천동에 있는 갈처사에게 가서 정자의 현판 글씨를 받아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김언거는 수년간 현금 열 냥씩으로 갈처사에게 글씨를 써 달라고 청하였는데, 13번이나 청한 끝에 비로소 만남이 성사되었다. 김언거는 심산 기암에 있는 담배밭에서 갈처사와 조우하였는데, 갈처사는 즉시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정호[풍영정]의 글씨를 써 주었다.

김언거가 글씨를 받고 돌아가려 하니 이미 해가 저물어 곤란하였다. 이때 갈처사김언거에게 축지법을 써 주면서 "돌아가는 도중에는 절대로 주지(周紙)를 펴지 마시오. 친우들을 만나서 글씨 보기를 간청하여도 절대 보여 주지 마시오. 현판에 도착한 후에 비로소 펴 보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김언거갈처사에게 후한 접대를 받지 않아 기분이 불쾌했지만, 그래도 소망했던 글씨를 얻었다는 마음에 의기양양하면서 길을 떠났다. 하지만 도중에 김언거갈처사의 말을 잊었다. 김언거가 길가에 앉아 글씨를 보려고 주지를 펼친 순간, 풍영정의 '풍' 자가 날아가 없어졌다.

김언거는 날아간 글씨를 다시 받으려고 갈처사에게 갔다. 갈처사김언거를 나무라며 "내 글씨를 얻으려고 수년 동안 수십 회를 찾아와 천신만고 끝에 글을 얻었는데, '풍' 자 한 글자를 다시 얻으려면 예전 노고의 삼분의 일을 다시 해야 한다. 그때를 기다리기엔 둘 다 늙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군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제자인 황처사를 소개해 줄 테니 황처사에게 '풍' 자를 써 달라고 부탁하라"고 말하였다. 갈처사는 다시 축지법을 써서 김언거가 황처사의 처소에 도착하게 하였고, 황처사는 글씨를 써 주었다. 이에 김언거는 글씨를 품 안에 간직하고, 즉시 현판에 새겨 정각에 걸었다. 지금 그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영정' 석 자 중에 '풍(風)' 자가 '영정(詠亭)' 자보다 자획이 조금 가늘고 위치가 조금 아쉽다고 한다.

이후 풍영정은 국내 여러 명현들이 교류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호남의 절경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침공하여 정각 11동을 불태워 없애고, 풍영정에도 불을 질렀다. 그때 '풍영정' 석 자가 자획마다 흩어져 물오리가 되어 날아가 극랑강 물위에 떴다. 이 광경을 본 왜군의 장수가 이상하게 여겨 즉시 부하들을 시켜 화재를 진압하니, 물에 앉았던 물오리들이 나시 날아가 현판에 앉아 자획으로 변해 풍영정 석 자가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왜군들은 이를 보고는 풍영정을 불태우지 않고 물러갔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풍영정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건물의 유래에 관한 일화'이다. 김언거는 중종 때 관직을 제수(除授)받아 관료 생활을 지속하다 1560년에 전라도 광주로 내려와 풍영정을 세웠다. 이후, 김언거는 82세로 죽기 전까지 풍영정에서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 이름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풍영정 내에는 김인후, 이황,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송인수, 이호민, 권필, 이안눌, 박언침 등의 제영(題詠)이 걸려 있다. 사실 김언거는 1560년(명종 15년)에 관직을 내려놓고 풍영정에서 지냈다. 따라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종이 김언거에게 현판에 관한 명을 내린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다만, 김언거풍영정 앞에 있는 극락강의 옛 이름인 칠천(漆川)에서 자신의 호를 따서 붙이고, 극락강변에 풍영정을 세운 것으로 보아, 풍영정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하였던 김언거의 열성을 확인할 수 있다. 김언거가 현판의 글을 얻기 위해 명필가인 갈처사에게 13번이나 부탁한 내용에서도 김언거의 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 호남지방문헌연구소(http://www.honamcultur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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