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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97
한자 金元範
영어공식명칭 Kim Wonbeom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 1월 9일연표보기 - 김원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2월 - 김원범 형 김원국과 함께 김준 의병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2일 - 김원범 창평현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 소좌와 부하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7월 - 김원범 대동창의단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8년 9월 - 김원범 조경환 의병부대 도포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9년 2월 - 김원범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됨
몰년 시기/일시 1909년 9월연표보기 - 김원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김원범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조경환 의병부대 도포장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전라남도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3월 형 김원국(金元國)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 무등산에서 거병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창평·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08년 1월 창평현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카 츠사부로[吉田勝三郞] 소좌를 사살하였다. 이후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나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김원범은 1907년 12월 형 김원국과 함께 김준(金準) 의병진 휘하에 들어갔다. 김준의 휘하에 들어간 김원범은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장성군 등지에서 광주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김준 의병진과 함께 1908년 2월 2일에는 창평현 무동촌에 잠입하였다. 이때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카 츠사부로 소좌는 밀정들의 첩보를 통해 마을로 진격하였다. 이에 김원범은 마을 입구 돌담에 매복하여 김준의 명령에 따라 집중사격으로 요시다카 츠사부로 소좌와 부하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장성군 토천(土泉), 영광군 낭월산(郎月山), 장성군 광곡(廣谷), 광산군 어등산(魚等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4월 25일 김준이 순국하자 1908년 7월 전해산(全海山) 의병장의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에서 활동하였으며, 1908년 9월 조경환(曺京煥) 의병부대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선암시장에서 형 김원국을 만나 함께 합류하기를 권유하였고, 이에 형 김원국은 선봉장으로 합류하였다. 김원범은 부하 20명을 이끌고 영광군 황량면 밀정 변영서(邊永瑞)가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즉시 출동하여 함평군 식지면 군평(群坪)에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김원범은 1909년 1월 중순까지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조경환어등산의 사동(寺洞)에서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 의진으로 들어가 중군장을 맡았다. 1909년 2월 전라남도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다. 1909년 9월 2일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스스로 혀를 깨물고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을 201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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