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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토교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102
한자 光州土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터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구성로 238번길 32-11[계림동 385-4]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재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광주 토교 터 - 광주광역시 동구 구성로 238번길 32-11[계림동 385-4]지도보기
성격 옛터

[정의]

경양방죽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물줄기를 건너기 위해 만든 흙으로 쌓은 다리가 있던 옛터.

[개설]

광주 토교(土橋)무등산에서 발원하여 경양방죽(景陽防―)광주천으로 흘러들어가던 동계천(東溪川)의 물줄기를 가로지르기 위해 설치한 교량이었다. 토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흙을 쌓아 만든 교량 시설로 물줄기는 관로를 통해 흘렀던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 토교는 일제강점기 때에 광주면 성저리로 불린 지역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동계천로와 중앙로, 옛 광주역 철도가 만나는 지점 정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점은 경양방죽으로 흘러드는 동계천을 중심으로 동서를 나누는 위치에 해당하는데, 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 당시 서쪽에는 광주천변에 광주고등보통학교가 동쪽으로는 경양방죽 인근에 일본인 학교 광주중학교가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의 조선인 학생 400여 명과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 100여 명이 개천을 넘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광주 토교를 두고 대치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격투를 벌인 뒤였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를 유지하였고, 학생들을 지지하는 일반인들까지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경찰의 해산 명령과 양교 교사들의 설득에 의해 양측은 평화롭게 동시 퇴각하여 난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변천]

광주 토교경양방죽의 기능 축소와 매립, 도로의 확장과 하천 복개 등으로 그 기능을 다하여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광주 토교 옛터로 추정되어 광주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된 곳은 광주광역시 동구 구성로 238번길 32-11 일대인데, 동계천로와 중앙로를 살짝 비켜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위치 비정에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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