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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08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노성태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의 고려시대 전라도 광주 지역의 역사.

[고려의 지방제도와 광주]

고려의 지방 제도는 983년(성종 2)부터 995년(성종 14) 사이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983년에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12목이 설치된 지역은 양주·광주(廣州)·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이다. 이들 12주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방 행정상의 요지가 되어 온 지역으로 상주·진주·전주·공주는 9주에 해당하였으며, 충주와 청주는 5소경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2목 중 전라도 광주 지역에는 나주·승주가 해당하였다. 전라도 광주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9주의 하나인 무주였으나 다른 9주의 치소였던 전주·공주 등과는 달리 목이 설치되지 못하여 나주나 승주보다 그 격이 낮아졌다. 전라도 광주 지역에 목이 설치되지 못한 것은 광주가 후백제의 중심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광주는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의 적대 세력인 견훤의 세력권이었다. 견훤의 사위 지훤(池萱)은 무주의 성주였으며, 후백제 멸망기에는 견훤의 셋째 아들 용검(龍劍)이 무주도독으로 있었다. 이와는 달리 나주는 다련군(多憐君) 오씨가 왕건과 혼인 관계를 맺는 등 일찍부터 왕건의 세력에 편입되어 고려 왕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승주는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 장군인 박영규의 세력이 있었던 곳이다. 박영규는 신검의 모반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왕건에게 귀순하자 곧바로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이처럼 나주와 승주는 광주와는 달리 이른 시기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려 건국에 크게 이바지하였기 때문에 고려 초기 중요한 지역으로 대우를 받았다.

[광주의 위상 변화]

995년(성종 14) 고려는 지방 관제를 정비하여 절도사 체제로 개편하고 10도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현재의 광주광역시·전라남도 지역은 해양도(海陽道)에 해당하였다. 해양도는 나주·광주·정주·승주·패주·담주·낭주 등의 주현으로 구성되었으며 14주 62현을 담당하였다. 해양도 시절 광주에는 자사(刺史)가 파견되었는데, 자사는 도호부사나 절도사 등과 같이 군사적 성격이 강한 외관이었으며, 지방관의 등급으로 볼 때 그 위상이 절도사가 파견된 나주와 승주, 도호부사가 파견된 낭주[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도단련사가 파견된 담주[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다음이었다. 이후 광주는 다시 이름이 해양(海陽)으로 바뀌고 현령이 파견되는 고을로 격하되었다.

1018년(현종 9) 현재의 전라북도 지역의 강남도와 해양도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으며, 이때 전라도의 행정 중심지는 계수관이 파견된 나주와 전주이었다. 전라도 광주 지역은 1259년(고종 46) 당시 무인 집권자였던 김준의 외가 본향이라는 연고로 지주사관(知州事官)으로 승격되어 이름을 익주(翼州)라고 바꾸었다가 후에 광주목으로 다시 격이 높아졌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강등되어 화평부(化平府)라 불리게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무진부(茂珍府)로 바뀌었는데, 이때 이름이 옛날의 ‘무(武)’에서 ‘무(茂)’자로 바뀐 것은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하여 고친 것이다. 1373년(공양왕 22년)에는 다시 광주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광주의 이름은 해양, 익주, 화평, 무진 등으로 불리었고, 고을의 행정 등급은 목·부·주·현 등 최고의 급이 되었다가 최하의 급으로 떨어지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무신의난과 대몽 항쟁기의 광주]

전라도 광주 지역은 고려시대에 특별한 정치적 사건과 연관되어 크게 주목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무신의난 직후 담양에서 이연년 형제의 민란이 일어나 전라도 광주 지역이 장악되었고, 몽골의 6차 침입 시에 차라대의 몽골군이 무등산에 주둔한 후 전라도 광주 지역 일대를 약탈하였다. 또한, 고려 말 광주 지역은 6차례나 왜구의 침입을 당하였으며, 특히 1381년(우왕 7년)에는 왜적이 무등산 규봉암에 목책을 세워 은거하였고, 1387년(우왕 13)에는 광주가 함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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