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121
한자 全南道是製絲株式會社
이칭/별칭 전남제사주식회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서구 독립로185번길 2[양동 6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6년 5월연표보기 -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75년연표보기 -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해체
개칭 시기/일시 1954년 6월연표보기 -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에서 전남제사주식회사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11월 - 전남대학교 기성회에 불하(拂下)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6월 - 금호 박인천 회장에게 인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에 합병
최초 설립지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 광주면 교사리 천정(泉町) 1번지
최초 설립지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 광주면 교사리 천정(泉町) 60번지
현 소재지 금호 1차 아파트 - 광주광역시 서구 독립로185번길 2[양동 61]지도보기
성격 근대기업

[정의]

일제 강점기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에 있었던 전라남도 지역 최초의 생사 공장.

[개설]

삶아서 익지 아니한 명주실, 생사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공장이다.

[설립 목적]

일제는 누에고치 수탈을 목적으로 누에고치 생산량이 많았던 광주, 전남 지역에서 생사를 생산하여 수출하기 위해 대규모 공장을 설립하였다.

[변천]

1926년 5월 창립되어 대규모 공장으로 운영되다가, 해방 후 일본인 관리자들의 부재 속에 혼란과 경영난을 겪었다. 이와 더불어 누에고치 생산량의 감소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51년 11월 전남대학교 기성회에 불하(拂下)되었다. 1954년 금호 그룹 창업주 박인천 회장이 인수하여 가네보 광주공장과 와카바야시 공장의 제사 시설 흡수 및 합병을 통해 전남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1973년 전남제사주식회사삼양타이어(금호타이어의 전신)로 합병되어 삼양타이어의 제사사업부로 개편되었다가 1975년 삼양제사(전라남도 장성읍 연천리)에 매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의 공장 건물은 3,153평, 부지 2만평, 종업원 696명, 연간 생사생산량 62,400kg의 규모였다. 제풀 수출지는 미국과 일본으로 공칭자본금(公稱資本金)은 200만엔(円), 불입자본금은 50만엔이었다. 주로 생사, 옥사(玉絲), 즉 쌍고치에서 뽑은 명주실 등을 제조하여 판매하였고 기타 잠(蠶)의 매매중개(賣買仲介)나 저장창고업(貯藏倉庫業)도 운영하였다.

[현황]

전남제사주식회사의 부지는 한때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건물로 쓰이다가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으로 학교가 이전되자, 금호생명빌딩이 들어섰다. 2021년 기준 금호아파트 1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에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는 전남 지방의 연간 300톤 이상의 누에고치를 확보하여 생사와 옥사를 제조하여 미국과 일본에 수출하였다. 이 시기 국제 생사 가격의 상승으로 호황을 누려 일제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공장에 젊은 여성 구직자들이 많아지자 인물 위주로 뽑았고, 다른 공장들보다 인물이 출중하여 이에 관한 노래도 생겨날 정도였다. 여성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며 일본인들의 엄격한 감독을 받으며 합숙생활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의 아픔과 여성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린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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