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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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過景陽池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62년 - 정약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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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36년 - 정약용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79년 - 정약용이 「과경양지」를 지음 |
배경 지역 | 경양지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
성격 | 시 |
작가 | 정약용 |
[정의]
1779년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던 저수지인 경양지(景陽池)를 지나면서 정약용이 쓴 오언율시.
[개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근기(近畿)[서울에서 가까운 지역]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 때 문신으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조선시대 천주교를 이르는 말]으로 인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약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 중농학파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과경양지(過景陽池)」의 배경이 되는 경양지는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에 있던 저수지이다. 『광산읍지』를 보면 이 저수지는 세종 때 광주 효천 덕림 태생인 김방(金倣)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양지는 1930년대에 최대 21만 8182㎡[6만 6000평]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에 15만 2066㎡[4만 6000평]가 매립되었고, 이후 1960년대 말엽 전부 매립되면서 사라졌다.
[구성]
「과경양지」는 한 구에 다섯 자로 이루어진 오언율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1권에 실려 있다.
[내용]
「과경양지(過景陽池)」[경양의 못가를 지나며]
잡수임관도(雜樹臨官道)[잡목은 큰 길가에 늘어서 있고]
방지근역루(芳池近驛樓)[역루 가까이에 아름다운 못 하나 있네]
조안춘수원(照顔春水遠)[얼굴 비친 봄물은 아득히 펼쳐지고]
수의만운부(隨意晩雲浮)[저물녘 뜬 구름은 제 뜻대로 떠가네]
죽밀방행마(竹密妨行馬)[무성한 대숲에 말 몰기 어려운데]
하개합범주(荷開合汎舟)[연꽃 피어 뱃놀이에 제격이라]
홍재관개력(弘哉灌漑力)[크기도 하여라 관개의 공력]
천무득유유(千畝得油油)[천 이랑 논에 물이 넘치네]
[특징]
「과경양지」는 다산 정약용이 18세 되던 해인 1779년 2월에 쓴 오언율시이다. 다산은 1777년 16세 때 부친의 임지인 화순에서 형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1779년 2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가 그해 겨울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한다. 「과경양지」는 1779년 2월에 형과 함께 서울로 가는 여정 중에 경양지에 있는 역참을 지나면서 쓴 것이다.
[의의와 평가]
다산 정약용의 과거 합격 전 초기 작품 세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경양지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