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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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난진이퇴(難進易退)의 가풍이 형성되다]
김종직(金宗直)은 작고한 지 6년 만인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로 삭탈관직과 부관참시라는 큰 화를 입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다행히 어린 나이의 아들 김숭년(金崇年)이 화를 피해 가문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506년(연산군 12)의 중종반정으로 김종직은 신원이 회복되고 그 후손들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고위 관직을 역임하지는 못하였다.
김종직의 후손들은 17세기 중반 개실마을에 정착한 이후 18세기를 거치면서 영남의 남인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점차 관직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김종직의 후손들은 무오사화와 영남 남인의 몰락 등의 정치적 격랑 속에 관직으로 진출하는 데 제한이 있었다. 또한 후손들 스스로도 향촌 사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보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평안하게 하는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무게를 두었고, 벼슬길에 나아갈 때는 신중하지만 물러날 때는 과감하게 사퇴하는 난진이퇴(難進易退)를 중시하는 가풍이 형성되었다.
[새마을 운동에도 옛 전통을 유지하다]
개실마을은 선산김씨[일선김씨] 종손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에서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는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만, 1950년 6·25전쟁 때에는 고령 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개실마을에도 인민군들이 진주하였다.
개실마을의 선산김씨 종손 김병식[1933년생] 씨는 “인민군들이 종택을 주둔 본부로 사용했고, 고방채는 감옥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또, 중사랑채에는 보수하기 전까지 포격으로 기둥이 불탄 흔적도 있었어요. 한국전쟁 때 우리 집안사람들은 잠시 피난도 갔는데, 그때 집안에 전해 오던 점필재 선조의 유품들을 종택 뒤편의 대나무 밭에 굴을 파서 감추어 두었어요. 그 때문에 가보가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지요. 또 그때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 세 명을 키워 모두 시집, 장가도 보냈습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개실마을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인민군이나 좌익 세력들로부터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선산김씨 집안이 마을 내의 소작인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개실마을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도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
마을 내에 있던 초가집들이 없어지고 대신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 약간 증가하기는 했지만 마을 회의에서 전통 가옥을 보존키로 의결하여 전체 가구의 80% 가량 되는 전통 한옥을 보존하여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1975년 즈음에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하던 1980년대에는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국도 33호선 도로가 포장되는 등 마을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이 도로는 2009년 10월 마을 맞은편으로 이설되어 확장되었다.
이처럼 개실마을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새마을 사업을 거치면서도 마을의 외양은 변모하지 않았으나 탈 농촌화와 노령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즉, 전 사회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여느 농촌 마을과 마찬가지로 개실마을도 젊은이들이 학교와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을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급격한 노령화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130여 가구였던 가구 수가 1980년대에는 100여 가구로 줄었고, 1990년대를 거쳐 현재에는 60여 가구로 지속적인 감소가 이루어졌다. 또, 30대와 40대의 인구가 감소하고, 60대 이상의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한편,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된 후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유산들이 법령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는 소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전통 문화에 대해서는 크게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개실마을에서도 1985년 8월에는 도연재가, 10월에는 점필재 종택과 유품들이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는 이들 문화재와 전통 마을로서의 개실마을은 마을의 발전 동력으로 크게 활용되지 못하였다.
[전통문화 체험마을로 거듭 태어나다]
개실마을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2001년 12월부터 행정자치부의 지원으로 시작된 ‘아름마을사업[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전통문화 체험마을로 새롭게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후 개실마을은 새마을 사업이 진행될 때보다 더 크게 마을이 바뀌게 된다. 이 사업은 “도시민에게는 건전한 여가 선용과 농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에게는 소득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전통 문화를 후세에 물려주기 위한 운동”이었다.
우선, 2001년 12월에 ‘개실마을가꾸기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김병만]가 조직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작목반, 부녀회, 노인회, 향우회 등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종 마을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마을 내의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옛 전통 마을의 모습을 새롭게 갖추었다. 마을 안길을 모두 흙담으로 개량하고, 주민이 공동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과 한옥 등을 보수·복원하였다. 또한 상하수도와 경로당, 마을회관 등 생활 편의 시설을 건립하였다. 더불어 주민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화개산 등산로를 개설하는 등 편리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도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버섯·고추·오이 등을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 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venture농장’과 ‘주말 농장’을 운영하였다. 특히 친환경 쌀을 현지에서 직판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2004년부터 왕우렁이와 쌀겨, 미생물, 긴꼬리투구새우를 이용한 친환경 농법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2006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딸기와 참깨, 긴꼬리투구새우를 이용하여 재배한 쌀 등이 친환경 농산물로 인증[무농약 농산물] 받게 된다. 더불어 개실마을의 브랜드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종가 전통 한과인 ‘종家손手’를 비롯해, 친환경 농산물인 딸기를 이용한 딸기잼, 엿, 수정과, 고추장 등 전통 음식들을 상품화하였다. 특히, 전통 한과는 개실마을의 친환경 인증 농산물을 재료로 사용하여, 부녀회원이 직접 전통 방법으로 제조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한과는 서울의 롯데백화점 등에 직접 납품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전국 각지의 도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농산물 재배와 충효·예절·한문·서예·관혼상제 등의 전통 문화를 교육하고, 엿 만들기·연 만들기·떡 만들기·한지 공예·압화 체험·물총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특히, 2006년 4월 개실마을 입구에 넓게 조성한 전통 놀이마당은 개실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상설 체험마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개실마을 내의 도연재 등 20여 개소의 전통 건축과 한옥 등을 개량하여 민박집으로 활용하였다.
체험 프로그램과 숙박 시설이 완비되자 개실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은 단순히 전통 문화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문화를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아름마을사업’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되자 추진위원회는 2006년 12년 ‘개실마을 영농조합법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친환경 농업을 통해 생산한 생산물을 가공하여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또 그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연계시킨 것은 개실마을만의 특별한 자랑거리라 할 수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김종직으로 상징되는 역사와 선비 정신, 종택을 중심으로 하는 유구한 전통 문화, 종손과 추진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혼연 일치가 된 개실마을 사람들의 협동심, 고령군을 비롯한 관계 기관의 지원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개실마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체험 마을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