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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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에서 두 아내와 선달벼슬을 얻은 이씨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조선시대에 무과 출신이면서 임관되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선달이라는 호칭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두 아내와 선달벼슬을 얻은 이씨」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선달벼슬이라도 하게 하여 명문가를 이루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벼고을농경문화테마파크[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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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중엽 전씨·송씨·오씨·조씨 등이 모여 살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참판·좌랑·정령·현감 등의 벼슬을 한 사람이 많이 살게 되자 관촌으로 부르다가, 관동(官東) 위에 있는 마을이므로 관상리(官上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마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관상리·석동리·거산리·송방리 일부, 북면 송중리·송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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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있는 자연마을. 구암마을 서쪽에 위치한 둔산마을 동쪽 들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팽나무 밑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거북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암(龜岩)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거북 구(龜)자 대신 아홉 ‘구(九)’자를 써서 구암(九岩)으로 바뀌었다.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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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말기 금구군 초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 신덕리·구호리·만복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내광리라 하고 김제군 초처면에 편입하였다. 1935년 초처면이 봉남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봉남면 내광리가 되었고,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에 속하게 되었다. 내광리 남부에서 원평천(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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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에 속하는 법정리. 만경읍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므로 대동리(大東里)라 하였다. 1460년경(세조 6) 전주이씨 이희금(李希琴)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희금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형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증손으로, 1453년(단종 1) 일숙(壹叔)인 좌찬성 이양(李禳)이 3명의 재상들과 함께 순절하고[공주 동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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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마을 동쪽에서 시냇물이 흘러내리므로 동계리(東溪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북이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정리·신전리·용전리·진산리·저산리 일부, 목연면 신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계리라 하고 김제군 공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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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인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김제시 세거성씨.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 유리왕 때 임금으로부터 정씨의 성을 받은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였으나, 계대가 전해지지 않게 되어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고 있다. 『을미보(乙未譜)』에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하였으나, 『병신보(丙申譜)』 이후부터는 문안공(文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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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에 있는 동래정씨 동성마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 유리왕 때 정씨 성을 하사받은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고 있으나 이후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한다. 조선시대에 전주이씨[22명], 안동김씨[19명] 다음으로 정승을 17명이나 배출하였고 대제학 3명, 대과 급제자 198명을 낳은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고려 때 양헌(良獻)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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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형국이 말을 닮았으므로 마현리(馬峴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동이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반곡리·남당리·내동리·공덕리 일부, 북이도면 진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현리라 하고 김제군 공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가 되었다. 북쪽에 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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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시대에 낙양현(洛陽縣)에 속하였고, 조선 말기 금구군 낙양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둔산리, 동면 유암리·대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동리라 하고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낙양현은 금구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7리[현재의 산동리·낙성리·청운리 지역]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1995년 1월 1일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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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의 우물물이 모두 돌 사이에서 솟아 나온다 하여 돌수 또는 석담(石潭)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공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약 420년 전 전주이씨 14대조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모리·상모리·중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담리라 하고 김제군 백구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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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미를 시조로 하고, 안수억과 안수천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김제시 세거성씨.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는 안자미(安子美)이다. 그는 고려 신종[1197~1204]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냈는데,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어 흥령현(興寧縣)[지금의 순흥]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안자미의 10세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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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내촌은 120여 호에 이르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해주오씨와 함양박씨의 집성촌이었다고도 전해 오지만, 현재 박씨와 오씨 성을 가진 가구는 10가구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마을에서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동래정씨다. 동래정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300~400년 전이다. 당시 마을에는 함양박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마을 내 대부분의 토지도 소유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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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반리의 ‘용’자와 유산리의 ‘산’자를 따서 용산리(龍山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금구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반리·유산리·등룡리 각 일부, 서도면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라 하고 김제군 하리면에 편입하였다. 1935년 용산리를 금산면에 편입함에 따라 김제군 금산면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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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에 있는 고대 고분군. 고분은 성토를 한 옛 무덤을 지칭한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의 경우, 완전히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서는 횡구식 석실분과 횡혈식 석실분 등의 양식으로 조성하였지만, 마한의 묘제가 남아 있을 때에는 옹관묘(甕棺墓)와 분구묘(墳丘墓)의 모습을 띠었다. 장화동 고분군의 경우 현재 규모를 알 수 있는 1기는 분구묘로 추정이 되지만, 유물 등이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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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있는 개항기 열녀 전주이씨의 정려.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정존혁의 아내로 집이 가난하여도 길쌈을 밤낮으로 하여 시부모를 봉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아버지가 죽은 후 3년간 머리도 빗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빠짐없이 공손히 하였다. 또한 남편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였는데, 남편 정존혁이 병으로 몸져눕자 더위와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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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복재(復齋). 증조부는 정인(鄭絪)이고, 조부는 정섬(鄭暹), 아버지는 정흥사(鄭興嗣)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 아내는 노숭(盧崇)의 딸이다. 정곤(鄭坤)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386년(우왕 12)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 1414년(태종 14)에는 전주교수관(全州敎授官)으로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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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촌락.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성씨 집단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인데,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혈연이다. 삼국시대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7세기 이후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널리 퍼지면서 가부장제가 정착되고, 이에 따른 혈연의식이 강화된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농업경제를 바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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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1936년 3월 20일에 청신녀 전주이씨 청정월(본명 이화월)이 자손 창생을 위해 작은 불당을 지은 것이 혜봉사(慧峰寺) 창건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 청정화의 수녀인 비구니 유정(有情)이 1967년에 유업을 받들어 어머니 차일심과 함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0여 년 만에 현재의 큰 가람으로 이룩해냈다. 1987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