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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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渭川 敎會 |
영어공식명칭 | Wicheon Presbyterian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창말2길 21[장기리 431-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규통 |
설립 시기/일시 | 1909년 1월 - 위천 교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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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8년 - 위천 교회 사택 건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 위천 교회 교육관 신축 |
현 소재지 | 위천 교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431-3 |
성격 | 교회 |
설립자 | 유응춘|유계수 |
전화 | 055-942-0064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소속 교회.
[개설]
1908년에 고제면 개명리에서 온 권사 권응서가 전도하여 유응춘이 종교를 믿게 되었다. 1908년 가을에 고제 물안실 마을에서 ‘모 노부인’[이름이 정확하지 않은 나이 많은 부인] 신자가 와서 찬송과 성경을 가르쳤다. 1909년 1월에 유기도가 안의에서 여러 명의 학생을 데리고 와서 예배를 거행했다. 후일 유응춘과 유계수가 가옥을 매입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설립 목적]
위천 지역의 복음 전파를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09년 1월, 상천리 6통 6호 3칸짜리 집을 매입하여 기도로소 정하고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후 1915년 예배당을 장기리로 이전하였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 노은상과 고운서가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장기리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예배당은 1978년 건축한 것으로 이후 1988년에는 사택을 건축하고, 2009년에는 교육관까지 신축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김유복 집사[86세]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었다. 1910년 교인 중 ‘전주 모 씨’가 의병 활동으로 일본 헌병에게 검거되어 전주 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위천 교회로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모 씨는 도망갔고 교인들이 구타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이에 유응춘은 진주에 있는 라대벽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라대벽 선교사는 일본 헌병들이 요구하는 돈 삼십 원을 주고 이들을 구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교인들이 낙심하여 교회는 일시 쇠퇴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교회를 이끌던 사람이 서간도로 이거했다.
1949년, 신사 참배를 반대하던 백영희 전도사의 지도를 받은 주일 학교 학생들이 위천 국민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거부하였다. 교사들에게 구타 및 경고를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던 중,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기자 이승만 대통령이 국기에 대한 배례를 주목으로 바꾸었다.
1950년, 백영희 전도사는 예배 중 들어 온 북한 군인을 호령하여 쫓아내기도 하였으며, 계속되는 북한군의 위협에 강단 밑 계단에 숨어서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잠시 고제 지인의 집에 피난하기도 하면서 6·25 전쟁 중에도 새벽 기도회를 계속하였으며, 미군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 지붕에 ‘church’라고 새기기도 하였다.
[현황]
2016년 현재 담임 목사 한 명 외에 네 명의 안수 집사와 네 명의 권사를 포함한 70여 명의 교인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웃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마을 회관과 관공서에는 귤을 나누어 주고 있으며,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는 각 반마다 선물을 한다. 교회의 성탄절 특별 헌금은 관내 불우이웃을 찾아 돕고 있다. 아울러, 지역 도서관을 건립하여 지역 학생들의 독서 지도 및 주민 화합의 장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워고 추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첫째, 일제의 강점기에 일부 신도들의 자발적인 의병 활동으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한 교회이다. 둘째, 6·25 전쟁 시기 공산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유지하려했던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교회이다. 마지막으로는 지역민들과 소통의 창을 열고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강령을 실천하므로 영혼 구원을 도모하는 교회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