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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60
한자 申允童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묘소|단소 신윤동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도봉동 산82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평산(平山)
대표 관직 한성부 판윤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할아버지는 동지중추원사·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으로, 신자근(申自謹)·신자경(申自敬)·신자수(申自守) 등 세 아들을 낳고 최승령(崔承寧)을 사위로 삼았다. 큰아들 신자근은 적처(嫡妻)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슬하에 첩자(妾子) 신개동(申介同)을 두었으며, 둘째 아들 신자경은 신윤오(申允悟)와 신윤동(申允童)[?~?]을, 셋째 아들 신자수는 신윤관(申允寬)을 낳았다.

신윤동은 사촌누이 및 자신의 딸을 통하여 세종과 중첩되는 혼인을 맺었다. 최승령의 딸이자 신윤동의 고종 사촌인 제안 부부인(濟安府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부 신자수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처이다. 신윤동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세종의 9남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과 혼인하여 영춘군(寧春君) 이인(李仁)과 길안도정(吉安都正) 이의(李義)를 낳았다.

[활동 사항]

신윤동은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묘표(墓表)가 마모되어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통하여 단편적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신윤동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 신자근이 적처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자 1415년(태종 15)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後嗣)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1434년(세종 16) 마음을 바꾸어 둘째 아들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으로 하여금 신자근의 후사로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문제는 신윤동이 요사(夭死)하면서 신효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아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봉사(奉祀)는 가사(家舍)의 상속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문제였기에, 신효창의 여러 적손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조정 신료들 사이에 논란이 발생하였다. 크게 신자경의 장손(長孫)이자 신윤오의 아들인 신종년(申從年)을 지지하는 입장과 신자수의 3남인 신윤관(申允寬)을 지지하는 입장이 대립하였다.

[묘소]

신윤동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번지도봉동 산82번지 일원에 자리 잡은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내에 사위인 영해군 이당, 딸 평산 신씨, 영해군의 손자인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의 묘와 함께 조성되었다. 묘 앞에는 규수형의 묘표가 서 있는데, 전면에 ‘증 의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후면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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