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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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仁壽 |
이칭/별칭 | 백정(伯靜),백분당(白賁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활동 시기/일시 | 1685년 - 조인수 영소전 참봉 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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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92년 - 조인수 졸 |
묘소|단소 | 조인수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3-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풍양(豊壤) |
대표 관직 | 의금부 도사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백정(伯靜), 호는 백분당(白賁堂). 할아버지는 조민(趙珉)이고, 아버지는 진사 조상정(趙相鼎)이다.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조경명(趙景命)·조영명(趙永命)·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이다. 셋째 아들인 조문명과 넷째 아들인 조현명은 영조 대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조인수(趙仁壽)[?~1692]는 박세채(朴世采)와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있었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685년(숙종 11) 타인의 천거로 영소전(永昭殿)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세상일에 염증을 느끼고 퇴거하여 독서에 몰두하였다.
[학문과 저술]
만년에 『주역(周易)』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계몽정전(啓蒙正傳)』 등의 책에 통달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전하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탁월하였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풍양 조씨 묘역에 있다. 묘역 가장 상단에 조희보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조인수(趙仁壽)의 묘가 있다. 묘역의 입구 왼쪽에 조인수의 묘갈이 있고, 오른쪽에는 묘비가 없는 무덤 2기가 있다. 전체 묘역의 좌향은 남동향이다.
조인수의 묘 앞에 있는 묘갈은 옥개형으로 4면비이다. 팔작지붕을 하였고, 비좌에는 별다른 문양을 조각하지 않았다. 전액은 ‘백분당 풍성 조공 묘갈명(白賁堂豊城趙公墓碣銘)’이고, 비제는 ‘유명 조선국 중훈대부 행의금부도사 백분당 조공 묘갈명 병서(有明朝鮮國中訓大夫行義禁府都事白賁堂趙公墓碣銘並書)’이다. 비문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최규서(崔奎瑞)가 지었으며, 판중추부사 서종태(徐宗泰)가 글씨를 썼고[書], 아들인 예문관 검열 조문명이 전(篆)을 썼다. 묘갈의 입석 연대는 ‘숭정 기원후 구십일 년 무술 시월일 입(崇禎紀元後九十一年戊戌十月日立)’으로 되어 있어 1718년(숙종 44)임을 알 수 있다. 묘갈의 규모는 옥개석 112×80×48㎝, 비신 68×33×143㎝, 비좌 120×78×69㎝이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 풍흥 부원군(豊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큰아들 조경명[1674~1726]이 조대수(趙大壽)와 송징은(宋徵殷)이 지은 조인수의 행장과 조인수의 지인들이 지은 제문 및 애도문 등을 수집하고, 서종태(徐宗泰)가 지은 묘지명을 함께 수록한 후 이세필(李世弼)에게 행록(行錄)의 후지(後識)를 부탁하여 『도사 조공 행록(都事趙公行錄)』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