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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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忠綽 |
이칭/별칭 | 군정(君貞),졸암(拙庵),낙빈(洛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521년 - 이충작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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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이충작 정시 문과 을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78년 - 이충작 졸 |
출생지 | 이충작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
묘소|단소 | 이충작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충청도 관찰사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정(君貞), 호는 졸암(拙庵)·낙빈(洛濱).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인데, 임영 대군파는 이충작의 증조할아버지인 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에서 분파(分派)하였다. 할아버지는 이진(李珍)이고, 아버지는 당은군(唐恩君)에 추증된 이휘(李徽)이다. 어머니는 현령을 지낸 오황(吳滉)의 딸이다. 부인은 진사 정호(鄭湖)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삼척 부사 이진(李震)의 딸이다. 첫째 부인에게서 1남 2녀를, 둘째 부인에게서 3남 2녀를 얻었다.
[활동 사항]
이충작(李忠綽)[1521~1578]은 충청도 직산[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서 태어났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9년(명종 14년) 정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에 발탁되었다. 이후 학문이 해박하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이유로 형조좌랑에 특진되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피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 실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효행을 조정에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헌부 지평과 장령, 사간원 헌납,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승려 보우(普雨)를 탄핵하다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명종 사후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특별히 승진하여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고, 이후 전주 부윤과 여주 목사를 지냈다. 선조가 이충작을 승지로 발탁하였을 때, 대간들이 실명한 자를 왕 가까이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니 선조가 교서를 내려 “오늘날 조정에 충작의 눈을 가진 자가 또 있는가. 나는 그의 눈을 취하였으니 그대들은 또 헐뜯지 마라.”라고 하여 이충작의 효행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대간들의 반대를 잠재웠다.
성품이 청렴하고 준엄하며 정직하다고 인정되어 선조가 그의 행실을 가상히 여겨 인사 추천이 있을 때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편당(偏黨)에 들지 않고 동인(東人)의 중심인물인 이발(李潑)[1544~1589]에 대해 비판하여, 항상 멀고 나쁜 주군(州郡)에 임명되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충청도 관찰사까지 올랐다. 문사(文詞)에 능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선영 옆에 있는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있다. 이곳은 임영 대군파 오산군 묘역인데, 현재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향으로 진행하다 신동아 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왼편 구릉에 있다. 묘역 입구에 재실(齋室)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