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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04
한자 睦林一
이칭/별칭 사백(士伯),청헌(靑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52-1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목임일 생
활동 시기/일시 1678년 - 목임일 증광시 병과17위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목임일 졸
유배|이배지 목임일 유배지 - 전라남도 해남군
유배|이배지 목임일 유배지 - 전라남도 장흥군
묘소|단소 목임일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모현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사천(泗川)
대표 관직 도승지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백(士伯), 호는 청헌(靑軒).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명인 현헌공(玄軒公) 목세칭(睦世秤)의 현손(玄孫)이며,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은 목서흠(睦叙欽)이다. 아버지는 남인의 영수로서 숙종 대 환국의 중심에 있었던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다. 어머니는 목내선의 계실인 윤창언(尹昌言)의 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부인은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우창적(禹昌績)의 딸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슬하에 목천현(睦天顯) 등 4남 3녀를 두었다. 사위는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이다.

[활동 사항]

목임일(睦林一)[1646~1716]은 1678년(숙종 4) 증광시에서 병과 17위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1681년(숙종 7)에는 평안도에 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수항(金壽恒)목임일이 역마(驛馬)를 바꿔 탈 때 형장(刑杖)이 낭자(狼藉)하였으며, 산사(山寺)로 놀러 다니고 연회를 베풀어 암행어사의 직임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으며, 숙종목임일을 나문(拿問)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사간원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687년(숙종 13) 다시 암행어사로 나아갔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송시열(宋時烈)을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조좌랑·홍문관 응교·대사간·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남인 세력이 축출 당하자 남인의 중심이었던 아버지 목내선과 함께 처벌받아 남해현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1701년(숙종 27)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자 국휼(國恤) 중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중궁으로 올리자고 심단(沈檀)·민언량(閔彦良) 등과 더불어 상소한 죄로 장흥에 원찬(遠竄)되었다. 여러 번 그를 구제하는 상소가 있었으나 풀어 주지 않다가 1704년(숙종 30)에야 풀려났다. 숙종은 그에 대해 “목임일에게는 인물을 상해할 마음이 없었다.”고 평하였다고도 한다. 아버지 목내선과 함께 남인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은 남아 있지 않고 선조인 목진공(睦進恭)의 묘갈이 남아 있다. 1426년(세종 8)에 세웠던 목진공 묘갈을 1716년(숙종 42)에 다시 세우면서 그 8세손인 목임일이 글을 짓고 9세손인 목천근이 글씨를 썼다. 목진공 묘갈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사천 목씨 묘역에 남아 있으며, 그 탁본은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면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오른쪽에 양효공 안맹담(安孟聃)과 정의 공주(貞懿公主) 묘역이 있는데, 그 능선의 동쪽에 사천 목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최상단에 할아버지 목서흠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선조 목진공(睦進恭)의 묘가 있는데, 목임일의 묘는 목진공의 묘 아래에 위치해 있다. 묘는 단분 합장(單墳合葬)의 형태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 등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그 외의 석물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묘갈(墓碣)은 1944년에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천 목씨 묘역 입구에 사당인 모현재(慕賢齋)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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