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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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悅南宮氏世居-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욱 |
[개설]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는 고려 성종(成宗)[960~997] 때 대장군을 지낸 남궁원청(南宮元淸)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1970년대 남궁복(南宮墣)이 도봉 서원(道峯書院) 복설(復設)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이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또 도봉구 경내에는 함열남궁씨 묘역 두 곳이 조성되어 있다.
[함열과 남궁원청]
함열(咸悅)은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해당하는 곳으로 백제 시대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으로 불렀다. 신라 경덕왕 때 임피군(臨陂郡)에 속한 함열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때에는 인근 용안현과의 병합으로 안열현이 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고종 연간에 전주부 함열군으로 개편하였다가, 1914년에 익산군에 병합되어 함열면이 되었다. 1979년에 함열읍으로 승격하였다. 시조 남궁원청은 고려 때 인물로 991년(성종 10)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김행성 등과 함께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으로 몰아낸 공로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었고, 감물아백(甘勿阿伯)으로 봉작(封爵)되었다. 이를 계기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함열을 관향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수천을 따라 자리 잡은 함열남궁씨]
함열남궁씨 세거지 는 도봉구 도봉동 서원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 삼각산에서 흘러내려온 무수천(無愁川)을 따라 종친회 사무실과 재실(齋室)인 무수재실(無愁齋室)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종 대에 한성 부윤을 지낸 남궁계(南宮啓)는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원종공신이 된 뒤, 지금의 도봉구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후손들이 도봉구 지역에 세거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함열남궁씨 13세손 남궁계(南宮啓)와 부인 능성 구씨의 단(壇)이 있고, 14세손 남궁치(南宮致) 부부의 묘가 있어, 조선 초기부터 함열남궁씨가 이 일대에 묘를 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함열남궁씨는 대부분 18세손인 남궁회(南宮恢)를 파조로 하고 있다. 남궁회(南宮恢)의 셋째 아들로 이조 참판을 지낸 남궁급(南宮芨)이 도봉 문중의 개조이다. 남궁급의 아들인 남궁철(南宮哲)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손자 남궁도(南宮燾) 이후로도 계속 도봉구 도봉동의 무수골, 방학동의 성고개, 쌍문동의 이패, 창동의 유만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현재 함열남궁씨 세거 마을은 도봉산 서원 마을에 포함되는 곳이다. 서원 마을의 선정과 각종 문화 사업의 전개에서 함열남궁씨 세거 마을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 시대에 형성된 동족촉 또는 집성촌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도봉 서원 복설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던 것 등을 계기로 하여 도봉구에서 추진하는 각종 전통 문화 사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물과 묘역]
현재 도봉구에는 함열남궁씨의 묘역이 두 곳 조성되어 있다. ‘묘역 1’은 도봉구 도봉동 산86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남궁찬의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의 묘, 신씨의 아들인 이조 참판(吏曹參判) 남궁익(南宮翼)과 한성 판윤(漢城判尹) 남궁숙(南宮淑)[1491~1553], 남궁익의 아들인 사섬시정(司贍寺正) 남궁희(南宮憘),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남궁침(南宮枕)[1513~1567], 지평 현감(砥平縣監) 남궁개(南宮愷), 남궁희의 아들 청풍 군수(淸風郡守) 남궁활(南宮活), 남궁숙의 아들 연안 부사(延安府使) 남궁제(南宮悌)의 묘가 있다.
정부인 신씨의 묘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문인석, 장명등을 갖추고 있다. 묘비는 이수형 1면비로서 이수 전면에는 이무기가 여의주를 바라보는 모습을 조각하였고, 후면에는 초생달과 구름무늬를 새겨 두었다. 비신 전면 상단에는 전서(篆書)로 ‘정부인 신씨 묘갈(貞夫人申氏墓碣)’이라고 새겼다. 남궁숙은 중종 연간 안산 군수로 재직하며 선정을 베푼 공이 인정되어 가자(加資)를 받았고, 평소에는 능리(能吏)라는 평을 받았으며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남궁숙의 묘는 단분 합장이고 근래에 호석을 둘렀다.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을 세웠다.
묘비는 1574년(선조 7)에 세웠고 전면에는 ‘정헌대부 한성 판윤 전라 황해 함경도 관찰사 병마절도사 남궁 공숙지묘(政憲大夫漢城判尹全羅黃海咸鏡道觀察使兵馬節度使南宮公淑之墓)’, ‘정부인 완산 이씨 부우(貞夫人完山李氏祔右)’, ‘정부인 고흥류씨 부좌(貞夫人高興柳氏祔左)’라 새겼다. 복두공복을 착용한 문인석은 높이가 174㎝이고, 망주석에는 운각과 여의두문을 장식하였고, 높이가 132㎝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 지붕의 옥개석을 씌워 두었고, 화사석의 네 면에 사각 화창을 뚫었다. 전체 높이는 149㎝이다.
남궁침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성 판윤,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묘는 단분 합장인데, 근래에 호석을 두르고 비석과 장명등을 새로 세웠다. 옛 묘비의 전면에는 ‘가선대부 형조 참판 겸 성균관 대사성 오위도총부 부총관 남궁공 침지묘(嘉善大夫刑曹參判兼成均館大司成五衛都摠府副摠管南宮公忱之墓)’, ‘숭정후 오십팔 년 을축 칠월 일 현손 숙 립(崇禎後五十八年乙丑七月日玄孫塾立)’이 새겨져 있어 묘비가 1685년(숙종 1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하였고 복두의 끈이 얼굴 옆으로 내려와 턱 아래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높이는 190㎝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 지붕을 얹었고, 화사석의 네 면에 원형 화창을 내었다. 상대석만 노출된 형태이며, 전체 높이는 113㎝이다.
‘묘역 2’는 도봉구 도봉동 산69-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근래에 세워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남궁계의 제단이 있는데, 비석 전면에 ‘조선 개국 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 부윤 충청 전라 병마도절제사 함열 남궁공 휘계지단(朝鮮開國原從功臣資憲大夫 漢城府尹忠淸全羅兵馬都節制使 咸悅南宮公諱啓之壇)’, ‘배정부인능성구씨(配 貞夫人 綾城 具氏)’라 새겼다. 이 제단 아래로 진사(進士) 남궁니(南宮柅), 박천 군수(博川郡守) 남궁치(致), 무공랑(務功郞) 남궁구(南宮構)의 묘가 있다. 이들의 가계를 살펴보면, 남궁계의 아들이 남궁치이고, 남궁니의 조부는 ‘묘역 1’에 묘가 있는 남궁희이며, 부는 남궁활이다. 남궁구는 남궁활의 차남이고 남궁니의 동생이다.
남궁치는 생몰년이 미상이고, 남궁계의 양자로 생부(生父)는 남궁좌(南宮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 군수를 지냈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근래에 호석을 두르고, 일부 석물을 새로 세웠다. 옛 묘비 전면에는 ‘통정대부 행박천군수 남궁치지묘(通政大夫行博川郡守南宮致之墓)’라 새겼고, 후면에 ‘숭정 정사 중각(崇禎丁巳重刻)’을 새겼는데, 이를 통해 1677년(숙종 3)에 원래의 비석에 다시 각자(刻字)했음을 알 수 있다.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게 진행된 상태이다. 의습선을 단순하게 표시하였고, 복두공복을 착용한 형태이다. 전체 높이는 122㎝로 소형이다. 새로 세운 묘비를 통해 배위 숙부인(淑夫人) 옥천 전씨와의 합장분인 것을 알 수 있다.
[도봉 서원 복설과 남궁복]
함열남궁씨가 세거하는 서원 마을은 도봉 서원이 있기에 마을 이름도 서원 마을이 되었을 정도로 도봉 서원이 큰 의미를 가진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제향(祭享)하기 위하여 건립되었고, 이듬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6년(숙종 2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병향(竝享)하였다. 당대의 고관 명사들이 끊이지 않고 들리는 곳이었고, 영조 연간에는 국왕의 어필(御筆) 사액을 받기도 하는 등, 도봉 서원은 당시 서울 인근에서 이름난 서원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대 명유들의 암각문 등은 이러한 당시 도봉 서원의 위상을 보여 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판(位版)은 각기 땅에 묻혔고, 도봉 서원 역시 훼철되었다. 1900년대 초반, 끊어졌던 제향(祭享)을 복행(復行)하자는 논의가 있어 춘추로 제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 1970년에 양주 향교의 전교(典校)를 맡고 있었던 남궁복의 발의를 통해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가 창립되었고, 서원 경내에 사우(祠宇)를 세워 조광조와 송시열을 병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봉 서원이 완전히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태로나마 다시 세워지는 데 남궁복의 기여가 컸으므로 그 기념비가 복원된 사우 옆에 세워져 있다.
[함열남궁씨 세거 마을 현황]
도봉구 함열남궁씨 세거 마을에 거주하는 남궁씨들은 대부분 18세손인 남궁회의 자손들임은 상술한 바와 같다. 함열남궁씨는 인구가 많지 않은 성씨로, 2000년 인구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도봉구에 거주하는 함열남궁씨는 117가구 385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