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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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五龍 |
영어공식명칭 | Seo Oryong |
이칭/별칭 | 최용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오룡(徐五龍)[1911~?]은 1930년 12월 무렵 대구 상업 학교에 재학 중 사사키 다카시[佐佐木隆]·이동우(李東雨) 등과 함께 김동욱·권영달·김홍열 등을 만나 ‘프로 과학 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구성원들은 일본 도쿄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이론 연구와 보급을 도모하였다. 그 직후 대구 상업 학교의 서상조·권태우·정학진 등이 가입하면서 조직이 확대되었다. 프로 과학 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의 부서 중 농촌 서클을 맡아 야학교를 대상으로 한 강연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1931년 8월 기독교회 야학 교사를 대상으로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에 대해 강연하였다. 그 내용은 “일제 관헌이 고의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충돌을 일으켰다. 조선 내의 보복 행위를 이용하여 민족적 대립 감정을 조장하여 중국·조선·일본의 피압박 민중의 공동 전선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는 것이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28일 기독교회 야학회에서 교사, 학생, 학부형 등 수백 명을 대상으로 “일반 노동자·농민은 총독·조선 은행·동양 척식 주식회사, 경찰 관리·자본가와 지주·고리대금업자·상인 등으로부터 압박과 착취를 당하여 세상은 사람의 피를 인간이 빨아먹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7일 서당 야학에서 학생 10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빈부 격차와 그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곧 “조선인의 쌀 소비고는 1년에 일인당 평균치 7승(升) 내외로서 매년 감소하고 있는 반면, 일본인의 쌀 소비고는 1석 이상으로서 매년 증가하는 경향에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로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민을 장려한 결과이다.”라는 내용이었다.
1930년 12월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와 대구 경찰서 고등계가 합동으로 보병 80연대, 대구 고등 보통 학교, 대구역 등에 뿌려진 격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밀 결사가 포착되어 구성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1932년 1월 23일 대구 지방 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2년 12월 대구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