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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06
한자 李在寅
영어공식명칭 Lee Jaei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연표보기 - 이재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이재인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이재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이재인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현풍 상리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 지도보기
활동지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여성
대표 경력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재인(李在寅)[1887~1968]은 1887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 등과 접촉하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이재인은 같은 학교 교사 임봉선(林鳳仙)과 함께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1919년 3월 8일 이재인은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50여 명과 함께 머리와 허리를 수건으로 졸라매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순식간에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이재인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재인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재인은 1968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재인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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