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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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 |
영어공식명칭 | Lee In |
이칭/별칭 | 애산(愛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9월 20일 - 이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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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2년 - 이인 경북실업보습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 이인 세이소쿠중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이인 일본 고등문과 시험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이인 경북중대사건 변론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이인 조선공산당사건 재판 변론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이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월 - 이인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이인 초대 법무부장관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3월 - 이인 제헌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이인 민정당 최고위원 역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이인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
몰년 시기/일시 | 1979년 4월 5일 - 이인 사망 |
출생지 | 사일동 -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 |
학교|수학지 | 심상소학교 - 대구광역시 |
학교|수학지 | 세이소쿠중학교 - 일본 도쿄시 |
학교|수학지 | 니혼대학 - 일본 도쿄시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71-18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인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초대 법무부장관 |
[정의]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이인(李仁)[1896~1979]은 1896년 9월 2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료 변호 및 민족 소송의 변론을 맡았고, 전시체제기에 조선어학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법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가계]
이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애산(愛山)이다. 아버지는 이종영(李宗榮)이고, 어머니는 정복희(鄭福姬)이다.
[활동 사항]
이인은 어릴 적에 대구향교와 동제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이후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달동의숙(達東義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1912년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를 졸업한 뒤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를 다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후 니혼대학 고등전공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이인은 1919년 9월 다시 일본 도쿄로 건너가 법률 공부를 한 후 1922년 일본 변호사 자격시험인 고등문과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인은 1923년 5월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낸 뒤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제2차 의열단사건 변호를 맡았다. 1924년에는 최윤동(崔允東)·이수영(李遂榮)·송두환(宋斗煥) 등이 대구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검거된 ‘경북중대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1925년에는 조선 최대의 사상사건이라 평가되는 조선공산당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이인은 1925년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관련 사건을 맡아 “주권을 읽은 백성은 옛 주인마저 잃었다. 이 어린 학생들이라도 어찌 한 방울의 눈물과 분노가 없겠는가”라는 유명한 변론을 남겼다. 1928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가 변론이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이었다는 이유는 6개월 정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이인은 광주학생운동, 안창호(安昌浩), 수양동우회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다.
1942년 12월 서울에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인의 한글 애정은 남달랐고, 평소 민족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조선어학회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이인이 붙잡히기 전인 1942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고 있던 정태진(丁泰鎭)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이극로(李克魯)·김윤경(金允經)·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 등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연이어 체포되었다. 이인은 다른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달리 함경북도 흥원경찰서가 아닌 함경남도 함흥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이때 당한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보행에 불편을 겪으며 지내게 되었다. 1943년 9월 검사는 이인을 비롯한 16명을 예심 재판에 회부하였고, 12명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인은 1944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이인은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당 최고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8인의 총무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0월에는 미군정청 특별범죄심사위원회의 수석대법관 겸 심사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46년 검찰총장을 맡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수사 지휘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법무부 장관을 사임하였다.
이인은 1957년부터 이승만 정권에 맞서기 위한 야당 통합 운동을 벌였고, 1960년 4·19혁명 때는 이승만 하야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7월 29일 치러진 선거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까지 민의원과 참의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1963년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어 벌인 범국민단일야당운동이 좌절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2년 유신 직전에 민족통일촉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인은 재산 모두를 한글학회에 기증하고 1979년 4월 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인의 저술로는 『애산 여적』[세문사, 1961]과 『반세기의 증언』[명지대학교 출판부, 1974]이 있다.
[묘소]
이인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22-17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2013년 대구에서 애산이인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대구변호사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옹호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를 포상하는 ‘애산인권상’을 2016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