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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16
한자 都禮鍾
영어공식명칭 Do Yej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4년 12월 25일연표보기 - 도예종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9년 - 도예종 일본 도쿄 영교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도예종 일본 도쿄 영교학교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도예종 일본 도쿄 서성중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4년 - 도예종 일본 도쿄 서성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1년 - 도예종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3년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53년 - 도예종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5월 - 도예종 경상북도 영주교육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도예종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및 민자통중앙협의회 조직부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4년 8월 - 도예종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 - 도예종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연표보기 - 도예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4년 4월 9일 - 민청학련사건 20주면 기념식 및 인혁당 추모제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5년 4월 8일 -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1월 23일 - 도예종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1월 - 도예종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
학교|수학지 영교학교 - 일본 도쿄시
학교|수학지 서성중학교 - 일본 도쿄시
학교|수학지 대구대학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대동 214-1]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현대공원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다부거문1길 51-75[가천리 919]
성격 사회운동가|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희생자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족자주통일운동협의회 조직부위원장|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 간사장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희생자.

[개설]

도예종(都禮鍾)[1924~1975]은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박정희 정권이 유신 반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하여 1974년에 조작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었다.

[활동 사항]

도예종은 1924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1939년 일본 도쿄 영교학교에 입학하여 1년 과정을 수료한 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도쿄의 서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광복 후에는 경상북도 영주의 서부국민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51년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으로 편입 후 졸업하였고, 1960년 5월 경상북도 영주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에서 발령을 하지 않자 대구에서 하재완(河在玩)·서도원(徐道源)·송상진(宋相振) 등과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을 조직하고 간사장을 맡아 한미 경제협정 반대, 일본 경제인 입국 반대,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 최대 규모의 통일운동 단체로 1961년 2월 25일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협의회의 조직부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1964년 박정희 정권은 전국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통일운동가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용공 집단이자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는 조직으로 몰아 1차 인민혁명당사건을 조작하였다. 도예종은 이때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74년 4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한 후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 관련 인사들을 체포하여 고문과 강압수사 끝에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배후 조직으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을 조작하였다. 도예종은 핵심 관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우홍선(禹洪善)·김용원(金鏞元)·이수병(李銖秉)·여정남(呂正男)·하재완·서도원·송상진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고, 다음 날인 4월 9일에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저술 및 작품]

도예종『영남일보』에 1961년 1월 22일부터 24일까지 「경제적으로 본 통일의 필연성」을 3회 연재하였고, 2월 8일부터 12일까지 ‘노동운동과 통일 문제’를 주제로 기사를 4회 연재하였다.

[묘소]

도예종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천리 919 현대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재심 공판에서 도예종을 비롯한 희생자 8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2015년 11월 서울고등법원에서도 인민혁명당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1994년 4월 9일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민청학련사건 20주년 기념식 및 인혁당 추모제가 거행되었으며, 2005년 4월 8일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2006년 4·9인혁재단이 설립되어 매년 4월 9일을 전후하여 희생자를 기리는 ‘4·9 통일열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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