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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양촌 고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B010105
한자 - 中心- 陽村 古宅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씩실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양촌 고택

[볕이 드는 곳에 처음 터를 잡은 양촌 고택]

양촌고택은 광산이씨의 세거지였던 성주군 고탄(현 고령군 성산면)에서 이른바 광산이씨光山李氏 삼처사三處士중의 한분으로서 낙강칠현으로 이름을 떨친 육일헌 이홍량의 차남인 이란미가 이주해 와 지은 집이다. 1610년(광해군 2년)에 건립된 이 집은 정남향인 마을의 한가운데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양촌 고택의 구조]

양촌고택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일자형의 사랑채와 ㄱ 자형의 중문채가 경사진 대지위에 일자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남동쪽으로 열린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사랑채]

옛 모습을 간직한 사랑채는 전면에 8자 정도 높이의 축대를 쌓은 후 정면 3간반, 측면 1간반 규모로 지어졌다. 실질적으로는 정면 3간, 측면 1간에 전면과 좌측면에 반간 폭의 툇간(부속 구조물)을 두었다. 그리고 사랑채의 가운데를 기준으로 중앙과 오른편에 2간의 온돌방을 두고 왼쪽에는 전면이 개방된 마루 1간을 둔 홑집 형태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특히 사랑채의 좌측면에 툇간 마루를 둔 것과 마루 외벽을 심벽(벽 속에 뼈대를 넣고 흙으로 바른 형태)으로 마감한 것은 남부지방의 평면구조에서 흔치 않는 예이다. 온돌방 전면에 시설된 쌍여닫이 세살문은 문의 높이가 높다. 그리고 뒷부분의 안채와 연결되게 온돌방 뒤편에 조그마한 문을 하나 두었다.

사랑채 건물의 외형을 살펴보면 바깥을 지탱하는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 머리는 초익공(初翼工)으로 장식하였다. 익공의 형상은 살미(山彌)의 길이가 짧은 앙서형(仰舌形)이나 초각 수법에 힘이 있어 초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살미 뒷뿌리는 선각(線刻)이나 초각(草刻)을 생략하여 대량(大樑)의 전단 보강에만 충실하다. 좌측면은 가적 지붕을 얹은 관계로 툇간의 기둥의 내진주고(內陳柱高) 보다 낮아 퇴량(退樑)이 내진주(內陣柱) 몸체에 결구(結構)되며 창방(唱榜) 뒷뿌리가 가적지붕의 박공판(朴工板)을 지지하게 하였으며, 판대공(板臺工)을 세운 3량 가구 홑처마지붕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 중문채]

사랑채와 연결된 중문채는 블록조로 건립되었다. 평면은 사랑채와 연결된 정면에 중문간과 헛간, 화장실을 두고 회첨(會檐)하여 부엌과 온돌방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붕에는 일식기와를 올려 사랑채와 안채와는 다소 어색하게 구성되어 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사랑채]

안채는 가운데 마당 보다 다소 높게 기단을 조성한 후 정면 5간, 측면 1간 규모의 일자형 건물을 세웠다. 평면은 좌로부터 부엌, 안방, 2통간 대청, 건넌방을 연결시켰으며, 안방과 건넌방까지 툇간을 두어 동선이 원활하다. 그러나 툇간 앞쪽에 유리를 넣은 4짝 미서기문을 시설하고 마루도 장마루로 교체되어 옛 모습을 상실한 것이 아쉽다. 상부가구는 3량이며 홑처마우진각지붕이다. 원래 안채가 처음 지어 졌을 때는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초가가 아주 오래되다 보니 비가 오면 새고, 수리를 해도 별 소용이 없었어. 석가래가 썩어 유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서 아버지 대에 석가래를 교체하고 기와를 올렸어요. 그 이후는 기와 무게도 있고...벽이 썩어서 오래 가지를 않더라고. 할 수 없어서 내가 한 팔년 전에 전부 헐어버리고 다시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양촌고택인 사랑채는 기와집인데, 그 앞에 있는 나무는 한 삼백 오십년 내지 사백년 쯤 되었어요. 회나문데, 옛날 회나무는 양반의 상징이라. 그래서 회나무를 심었는데. 집 중간 언덕에 심어 놓으니 너무 커가지고, 가지가 위험하게 자라서 좀 잘랐지. 보호수로 지정된 건 아니고...그리고 주춧돌도 그렇고 집을 지은 나무가 보통나무가 아니지요. 나무를 숯불에 구워서 나무에 있던 진을 빼가지고 사용을 했어요. 또 못을 안쳤기 때문에 나무가 잘 보전되어 올 수 있었다”라고 한다. (이영수, 남 73세)

이러한 특징을 가진 양촌고택의 사랑채는 삼리1리 씩실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참고문헌

달성마을지편찬위원회편, 『달성마을지』 (달성문화원, 1998)

『대구의 뿌리 달성』 (달성군지편찬위원회, 달성문화재단, 2014)

정보제공자

이영수(남, 1939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광산이씨 중파 14대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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