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18 |
---|---|
한자 | 書道東書院額板下 |
영어공식명칭 | Write Under The Sign Of Dodongseowon |
이칭/별칭 | 「도동서원 액판 아래에 쓰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정구가 1607년 도동서원 액판을 현액하면서 지은 글.
[개설]
「서도동서원액판하(書道東書院額板下)」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도동서원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배향하기 위하여 지어진 서원이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은 47곳 서원 중 하나이다. 이황은 김굉필을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하였다.
「서도동서원액판하」의 이칭은 「도동서원 액판 아래에 쓰다」이다.
[구성]
「서도동서원액판하」는 1607년에 쓰여졌으며, 이황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내용과 도동서원 현액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
「서도동서원액판하」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황 선생이 김굉필 선생의 서원 건립에 크나큰 의지를 가졌으나 살아 계실 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도동서원이 이황 선생이 계실 때 있었더라면 액호를 직접 쓰기를 가장 먼저 하셨을 것이다.
지금 서원이 중건되고 대궐에서 이름을 ‘도동(道東)’으로 하라는 명이 내려오고 판액(板額)이 곧 내려올 예정이다. 이황 선생이 쓴 편액 글씨 중 ‘도·동·서·원’ 네 글자를 찾아 본뜨고 새겨 서원으로 보냈다. 선생의 옛 필체와 성주(聖主)가 하사하신 판액이 안팎으로 빛나게 될 것이니, 배우는 자에게 종주로 삼고 법 삼아야 하는 곳을 알게 하였다. 우리 서원에 들어오는 선비들이 편액을 바라보며 선생의 덕을 상상하고 흠모하여 도동의 뜻을 깊이 체감할 것이다.”
[특징]
「서도동서원액판하」는 이황 글씨로 된 도동서원의 현판 아래에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서도동서원액판하」는 이황의 문인이었던 정구의 스승 존숭과 대구 지역에 이황의 성리학을 정착시킨 정구의 의지와 헌신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