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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대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152
한자 嶺南大路
영어의미역 Youngnam-daero Road
이칭/별칭 영남로,제4도,동래직로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도로와 교량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봉암리|가산면 심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조선시대 서울~부산간 간선도로
구간 칠곡군 동명면 봉암리~가산면 심곡리
길이 20㎞
차선 2차선
4~8m

[정의]

조선시대 칠곡을 거쳐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던 간선 도로.

[개설]

서울을 영남 지방과 연결하는 간선 도로이므로 영남 대로(嶺南大路)라고 하였다. 노폭은 대체로 4~8m이다. 노면은 황토로 피복되었으며, 비탈길 등의 일부 구간은 박석(薄石) 포장이었다. 영남 대로에 설치되었던 역원은 아래와 같다.

다부역(多富驛)은 소야고개 아래의 역이었고, 소야원(所也院)은 여행하는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국립여관이었다. 동명원으로 명칭이 변경된 독명원(犢鳴院)은 소야원의 소야고개 반대쪽에 있었다. 오늘날 동명면 학명리 독명 마을이다. 소야원이 관리를 위한 숙식처라면, 독명원은 일반인의 주막촌이었다. 역과 원이 생기면서, 관원과 행상인이 묵어갔고, 시장이 형성되어 상거래가 활발하였다.

주막촌(酒幕村)은 옛날의 원 터에 새로이 생성된 상업 취락 지구이다. 고려 때 원(院)의 대부분은 사찰 또는 지방의 뜻있는 양반이 설립하였다. 사찰에서 설립한 원은 순례자·행상에게 휴식·숙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찰에서 생산한 물품이 상인의 물품과 교역되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이후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따라 도로변의 사찰은 폐쇄되고 원은 국유화되었다. 원은 운영 부실로 조선 중기부터 폐쇄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여행자가 증가하자 옛날의 원 터에 주막이 생긴 것이다. 칠곡군 지역의 다른 역(驛) 및 원(院)은 다음과 같다. 동안역(東安驛)은 오늘날 약목면 동안리에 있었다. 이곳은 여행하는 관원이 여기에서 역마 또는 필요한 마필을 바꾸어 타던 곳이었다. 광혜원(光惠院)은 기산면 죽전 2리의 원골(院谷)에 있었다. 이것은 조선 선조 때 국가에서 운영했던 국립 여관으로서 여행하는 관원의 숙식 장소였다.

[변천]

2세기 중엽 계립재[156년]와 죽령[158년]에 도로가 개통되어,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 간에 교통이 활발해졌다. 역참 제도는 고구려 및 신라 등에서 국지적으로 실시되었다. 영남 대로의 본격적인 성립은 전국 도로망이 경주를 중심으로 통합된 통일 신라 이후이고 고려 시대에 역제와 남북 간 교통로가 처음으로 정비되어 총 22도, 525역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지는 산마루의 잘룩한 부분인 안부(鞍部)가 발달해 있어, 교통로가 특정 지점에 한정되지 않고 변경되곤 했다.

고려 초까지는 충주와 문경 간의 통로로서 계립재(雞立峴)와 하늘재를 이용하였으나, 고려 중기부터는 문경 새재[鳥嶺]를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이 확정되어 총 40도, 545역이 있었다. 초기에는 충주, 말기에는 청주를 경유하여 문경 새재를 넘었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 이후에는 추풍령을 경유하는 오늘날의 경부 국도가 형성되었고, 1925년에 국도 3호선이 이화령을 경유하여 개설되면서 문경 새재는 완연한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황]

지난날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거리의 노선이었다. 서울에서 용인·충주를 거쳐 문경 새재[643m]를 통과한 후 상주에서 칠곡·대구를 경유하여 밀양·동래·부산진에 이르렀다. 이러한 직선 노선은 지방 행정 중심지 및 군사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영남 대로가 주로 신속한 행정 및 군사 통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영남 대로의 연장선은 서울에서 의주(義州)에 이르는 서로(西路)이다. ‘의주-서울-부산’을 잇는 직선은 조선의 5대 도시 한양·평양·개성·충주·상주 이외에, 의주·안주·황주·광주·선산·대구·밀양·동래 등의 도시가 위치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간선 도로를 형성하였다. 또한 영남 대로와 서로의 연장은 일본 및 중국에 이르므로 국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역참(驛站)은 영남 대로를 따라 30리마다 있는 역이다. 각 도(道)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역의 감독을 맡겼다. 역리(驛吏)가 사는 역촌에는 숙식을 제공하는 역원(驛院)과 외양간이 있는 역사(驛舍)가 있었다. 영남 대로변에는 가로수로서 버드나무, 소나무, 주로 느티나무를 많이 심었고, 일정한 간격(4㎞)마다 장승, 토후, 돌무지, 정자목 등을 세웠다.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의 산지를 지나야 했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이 주로 보행과 말 또는 소의 등에 짐을 싣는 길마를 활용한 수송이었으므로 지형적 난관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육로 수송이었다. 서울의 한강 나루와 상주[진두리]의 낙동 나루를 제외하면, 하천을 건너야 하는 번거로움이 거의 없었다.

토천(兎遷)험로는 영남 대로에서 가장 험한 병목 구간으로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일대이다. 오정산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구불구불하게 2.5㎞가 이어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견훤의 군사를 무찌르기 위하여 이곳에 이르니 물은 깊고 계곡은 벼랑으로 둘러싸여 진군이 불가능했다.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도망하는 것을 목격한 군사 하나가 토끼를 쫓아가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을 발견했다. 고려군은 바위를 자르고 난간을 만들며 돌사다리길[棧道]을 열었다. 이후 이 길에 토끼비리[토끼낭떠러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토천험로는 관갑천(串甲遷)이라고도 불리며, 2007년에 문경 새재 옛길 및 죽령 옛길과 더불어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문경 새재 옛길은 명승 제32호이다.

칠곡은 충주 및 문경과 더불어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다. 소야(所也) 고개는 가산유학산 사이의 교통 요새이다. 이곳을 경유해야 문경의 새재[鳥嶺]나 풍기의 죽령(竹嶺)을 통과할 수 있었다. 소야 고개의 동쪽에 가산산성, 서쪽에 천생산성이 있다. 가산산성에는 칠곡 도호부가 위치했다. 영남 대로의 칠곡군 구간은 오늘날 대구, 구미와 상주 간을 잇는 국도 25호선중앙 고속 도로의 노선과 일치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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