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 딸 조낭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67
한자 趙性遠-趙娘子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홍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녀
성별
본관 함안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효녀.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단종(端宗)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의 후손인 조성원(趙性遠)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낭자(趙娘子)[?~?]는 타고난 마음씨가 곱고 평소에도 몸가짐이 바르고 엄숙하여 웃고 떠들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는 데도 몸을 삼가서 한층 더 정성스럽게 봉양하였다.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의 초상을 당해서는 예법을 따라 한결같이 장례를 치렀다.

다음 해 겨울, 마을에 무서운 역병이 번져 홀로된 어머니가 역병에 걸렸다. 오빠인 조인규(趙仁奎)가 모친의 병 치료를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섰다. 조낭자는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과 계집종 하나를 거느리고 집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강도가 집 안에 침입하여 조낭자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조낭자는 강도의 손을 뿌리치고 큰 소리로 계집종을 불러 촛불을 들고 오게 하였다. 조낭자의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란 강도는 집 밖으로 냅다 내빼 버렸다. 조낭자는 강도에게 손목을 잡힌 것이 치가 떨릴 만큼 원통하고 수치스러워서 당장에 자진을 하려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병에 차도가 있으면 그때 가서 자진을 해도 되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조금 나아지자 조낭자는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죽은 뒤에 원통한 사정이 풀리거든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 곁에 묻어주십시오. 만약 나의 원통함이 풀리지 않으면 시체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조낭자는 식구들이 없는 틈을 타서 작고한 부친의 빈소가 차려진 방안에서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진하였다. 그날로부터 삼일이 지나서야 고을 관아의 부리(府使)가 와서 조낭자의 사체를 부검하는데 그 안색이 살았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추운 겨울이라 부검이 끝나고 집 뜰에 가묘(假墓)를 썼다. 석 달 뒤 새로이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파서 아버지의 무덤 곁에 매장하려는데, 시신을 보니 과연 조낭자가 유언한 대로였다.

[상훈과 추모]

조낭자의 순절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척암(拓岩) 김도화(金道和)[1825~1912]가 조낭자의 전기(傳記)를 찬술하였다. 또 고을 관아의 부리가 유림(儒林)과 더불어 임금께 순절한 조낭자를 포상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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