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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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興 |
영어공식명칭 | Min Heung |
이칭/별칭 | 자기(子起),남은(南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440년 - 민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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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496년 - 민흥 사망 |
출생지 | 한양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안덕현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 |
외가|처가 | 경상도 청송도호부 안덕현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 |
묘소|단소 | 문거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여흥 |
대표 관직|경력 | 사용 |
[정의]
조선 전기 무신으로 청송에 정착한 여흥민씨 입향조.
[개설]
민흥(閔興)[1440~1496]은 조선 전기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일대에 정착한 여흥민씨(驪興閔氏) 입향조이다. 관직으로 사용(司勇)을 지냈다. 학문이 정심(精深)하였으나 서울에서 청송 안덕으로 입향하였으며, 은둔생활로 일관하고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이 행장을 쓰고 비문은 현손 민근효(閔根孝)가 썼으나 후에 외손 모계(慕溪) 김홍락(金鴻洛)이 비문을 써서 고쳐 세웠다.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기(子起), 호는 남은(南隱). 증조할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아버지이자, 태종(太宗)의 장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이다. 아버지는 적순부위(迪順副尉) 행사맹(行司猛)을 지낸 민촉(閔矗)이다.
어머니는 안인(安人) 영산신씨(靈山辛氏)로 신유현(辛有賢)의 딸이다. 민촉은 영산신씨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민연(閔然)이고, 둘째 아들은 민은(閔誾)이며, 셋째 딸은 주계한(周繼韓)에게 출가하였다. 넷째인 셋째 아들 민기(閔奇)는 진용교위(進勇校尉)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다섯째인 넷째 아들이 민흥이다. 여섯째인 둘째 딸은 최태(崔泰)에게 출가하였다. 민흥의 부인은 의인(宜人) 경주손씨(慶州孫氏)로 손사성(孫士晟)의 딸이다.
민흥의 장인인 손사성은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해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고려 말 청송 안덕에 정착한 권명리(權明利)의 사위이다. 민흥은 처가가 있는 청송 안덕에 내려와 터를 잡고 이후 청송 여흥민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인 큰아들 민세경(閔世卿)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사정(司正)을 지냈으며, 둘째인 딸은 현감(縣監)을 지낸 고령신씨(高靈申氏) 신징(申澄)에게 출가하였다. 셋째인 둘째 아들 민세정(閔世貞)은 생원(生員) 출신으로 현감을 지냈다.
[활동 사항]
민흥은 1440년(세종 22)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은 사용을 지냈으며, 학문이 심오하였다. 한양에서 처가가 있는 청송 안덕으로 입향하였으며, 그 후 은둔하면서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문거역(文居驛)] 동쪽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손중돈(孫仲暾)이 행장을 쓰고, 비문은 현손 민근효(閔根孝)가 썼다. 후에 외손 김홍락(金鴻洛)이 비문을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