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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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楫 |
영어공식명칭 | Shin Jeup |
이칭/별칭 | 여섭(汝涉),하음(河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섭(汝涉), 호는 하음(河陰). 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신경남(申慶男),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권제세(權濟世)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습독(習讀)을 지낸 신연(申演), 증조할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신종위(申從渭), 부인은 사정(司正)을 지낸 홍덕록(洪德祿)의 부계홍씨(缶溪洪氏)와 생원 김계(金繼)의 딸 상산김씨(商山金氏)이다. 신즙의 선대는 진보현 지역에 세거하다 할아버지 신연 대에 청송도호부 안덕현(安德縣)으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신즙(申楫)[1580~1639]은 1580년(선조 13) 안동 송촌리(松村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 외가에서 출생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4년(선조 37) 이언적(李彦迪)을 변무(辨誣)하는 일로 한양에 머물렀는데, 그해 임금이 유생들을 위해 거행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자 13인 안에 들었다.
1606년(선조 39)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선조 41) 삼척교수(三陟敎授), 1609년(광해군 1) 정자(正字), 1610년 저작(著作), 1612년 박사(博士)와 전적(典籍)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함창현(咸昌縣) 율리(栗村)에 은거하였다. 은거하는 기간 동안 신즙은 여러 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아울러 조준도(趙遵道)가 건립한 청송도호부의 방호정(方壺亭)[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을 찾아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가자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해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1626년(인조 4) 형조좌랑을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부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군량미 조달과 흩어진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628년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발생한 유효립(柳孝立) 모반 사건의 추국(推鞫)에 참여하여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공청도도사(公淸道都事)를 거쳐, 1630년(인조 8)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머물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용궁현(龍宮縣)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637년(인조 15) 한성서윤(漢城庶尹)과 형조정랑, 1638년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이해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으며,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와 구마(廐馬), 그리고 『근사록(近思錄)』 1책을 하사받았다. 그해 8월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임명되었는데, 부임 직전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9권 5책의 『하음집(河陰集)』이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하풍리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