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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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沈氏縣監公派所藏古文書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은영 |
작성 시기/일시 | 1897년(1903년, 1904년 제외) -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 중 호적표 작성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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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시기/일시 | 1907년(1903년, 1904년 제외) -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 중 호적표 작성 완료 |
발급 시기/일시 | 1890년 -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 중 심유택 무과 급제 교지 발급 |
발급 시기/일시 | 1891년 -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 중 심의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임명 교지 발급 |
발급 시기/일시 | 1905년 -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 중 심유택 충의위 임명장 발급 |
소장처 | 청송심씨 현감공파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
발견|발굴처 | 청송심씨 현감공파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
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심유택|심의록 |
용도 | 임명|보고 |
발급자 | 국왕|이지용|심유택 |
수급자 | 심유택|심의록|의성군수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청송심씨 현감공파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개설]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는 심홍부(沈洪孚)의 21세손 심의록(沈宜祿), 22세손 심유택(沈有澤) 부자대(父子代)에 작성된 교지와 호적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고문서와 족보(族譜)를 참고하면 심유택의 7대조 심약문(沈若汶)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으며, 고조할아버지 심확 대에 경기도 파주에서 의성 점곡면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의성에 정착한 심유택 가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의성에서 청송으로 이주하였다.
[제작 발급 경위]
심유택 무과 급제 교지는 무과에 급제한 심유택에게 1890년 국왕이 발급하였다. 심의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임명 교지는 1891년 심의록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임명한다는 교지로 국왕이 발급하였다. 심유택 충의위 임명장은 9품 종사랑 심유택을 충의위로 임명한다는 내용으로 1905년 궁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이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이전에는 하급 관리의 임명장을 차정첩(差定帖)이라 하였는데, 이 임명장 역시 같은 성격의 고신(告身)이다. 호적표는 갑오개혁 이후 사용된 것으로서 이전의 호구단자(戶口單子)와 동일한 성격의 문서이다.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호적표는 모두 12건으로 의성군수(義城郡守)에게 제출하였다. 9건으로 가장 많은 호적표를 남긴 심유택은 1897년부터 1907년까지 1903년과 1904년을 제외하고 매년 작성하였으며, 이외에도 연대 미상의 심상길(沈相吉), 심일길(沈日吉), 심주택(沈周澤)의 호적표 각 1건씩이 있다.
[형태]
교지와 호적표는 낱장으로 되어 있으며, 호적표는 크기가 가로 20.5㎝, 세로 29.2㎝로 모두 동일하다. 심유택 무과 급제 교지는 붉은색 종이에 급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서 홍패(紅牌)라고도 한다. 크기는 가로 52.0㎝, 세로 80.0㎝이다. 심의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임명 교지는 가로 72.0㎝, 세로 53.0㎝의 백패(白牌)이다. 심유택 충의위 임명장은 가로 57.5㎝, 세로 38.3㎝이다.
[구성/내용]
교지와 임명장을 통해 1890년 심유택[1848~1916]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1905년 종9품 종사랑으로서 충의위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송심씨대동보』를 참고하면 심유택의 아버지 심의록(沈宜祿)의 오자(誤字)로 추정된다. 호적표는 의성군(義城郡)에 제출한 것으로서 최소한 1907년까지 심유택, 심상길, 심일길, 심주택 등이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수남리(水南里) 어룡(魚龍)에 거주했었음을 알려준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그 이후 청송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묘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심의록의 묘소는 현재 의성군 점곡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심유택의 묘소는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甘淵里) 어울산(魚蔚山)에 위치해 있다.
[의의와 평가]
청송심씨 현감공파의 청송 이주와 가문 현양(顯揚)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