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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074
한자 閔箕世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종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7년연표보기 - 민기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10년연표보기 - 민기세 사망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여흥(驪興)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야(聖野)이다. 우찬성 지애(芝厓) 민형남(閔馨男)의 7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민계(閔堦)이다. 아버지는 민사정(閔師貞), 어머니는 승지 정택하(鄭宅河)의 딸이다.

[활동 사항]

민기세(閔箕世)[1767~1810]는 1767년(영조 47) 직산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노령에 낳아 젖이 부족하였다. 이에 민기세는 형수와 비녀(婢女)의 젖을 번갈아 얻어먹고 자랐는데, 기이하게도 형수의 젖을 먹을 때는 두 손으로 젖을 받치고 먹으며 비녀의 젖을 먹을 때는 누워서 젖을 주무르며 빨았다. 이 광경을 본 부모는 아이가 너무도 영리하여 화를 입을까 오히려 근심하였다.

민기세는 성장함에 따라 도학에 뜻을 두어 실천궁행의 학을 목표로 공부하였는데,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으며 사서의 오의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엄중히 타이르며 아버지가 문호를 세워 주기를 바란 뜻을 져버리지 말라 했다. 급제 뒤 학문을 닦아도 늦지 않으며, 3대에 걸쳐 벼슬하지 못하는 상황을 면하라 부탁했다. 이에 민기세는 아버지의 유언과 어머니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어 과거를 보아 1795년(정조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3년(순조 3)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으로 봉직하였다.

1808년(순조 8) 비인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민기세의 애회함이 너무 지나쳐 칭송 않는 이가 없었다. 현감시절 민기세는 관리로 직분을 다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사리에 따라 처리하였다. 효행을 권장하고 노인을 예우하며 관용을 줄이고 세금을 덜어 주었다. 백성이 바치는 과실과 어물은 봉친할 것만 남기고 효행이 지극한 집에 나누어 보냈다. 또한 선비를 모아 학문을 장려하며 과제를 주어 매월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기세는 아버지의 유훈대로 무현관을 면하자 이내 퇴임하여 병석의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고 학문의 궁극의 이치를 닦았다. 민기세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어머니가 눈병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하루는 쇠간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푸줏간에 가서 더운 간을 사다 드렸다. 간은 비린 음식이라 식으면 비위가 상한다 하여 조금이라도 늦을까 염려하여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손수 푸줏간 출입을 한 것이다. 품관이 푸줏간 출입을 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에 백정이 감동하여 소를 잡으면 간부터 떼어 민기세의 집으로 달려 왔다 한다. 또 어머니 간병을 다른 가족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변기 씻기와 세탁을 하여 아래 사람들이 행여나 더럽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민기세는 평생을 새벽에 관대를 갖추고 사당참배를 하였고, 기일에는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살폈다. 평생을 남과 다투지 않고 옳은 길로 인도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아래 사람을 애휼하였다. 당시 이 고장에서 효자는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다는 유행어가 나돌았다고 한다.

1810년(순조 10) 여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슬픔이 과하여 건강을 잃고 두어 달 앓다가 회생하지 못하고 43세에 사망하였다. 부인 이씨는 무오사화 때 명신 이목의 후예인데, 역시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두 아들 민종석과 민종속도 모두 근신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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