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
가을철의 별미 전어를 두고 흔히 창원 지역에서는 “가을 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말”이라거나,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를 맡으면 되돌아온다.” 혹은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문 걸어 잠그고 전어 먹는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가을철 전어는 별미 중의 별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어 중에 붉은색을 띠고 있고 그 맛이 일품인 전어를 흔히 ‘떡전어’라 부르는데 이...
-
일제강점기 귀산본동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나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게 된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던 마을 어르신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고(故) 이수복 옹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마을 구장도 했던 분이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그 해 8월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전쟁에 쓰던 물건들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수복 옹은 일본군...
-
석교마을 500-1번지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공직에 몸을 담았던 분으로, 1973년 마산시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마산시 창원지구출장소를 거쳐 창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창원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여 1995년 정년퇴임까지 22년간을 근무하였다. 이종현 옹의 가계는 마을 이장 일을 3대째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종현 옹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
석교마을은 마산항으로 드나드는 각종 크고 작은 선박들을 볼 수 있는 마산항의 아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창원공단에서 생산되는 각종 상품의 대부분도 이곳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는 등 물류 이동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바닷길이 일제강점기에는 황포돛배의 뱃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석교마을 사람들은 황포돛배를 ‘장배’라고도 불렀는데...
-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호로 마을 저수지가 무너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몇 년 동안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이종현 옹은 영세민 취로사업과 복구공사를 병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정부의 취로사업 목적은 영세민들의 연명(延命)에 있었는데, 이종현 옹은 연명과 저수지 공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이 시절은 봄에는 들로,...
-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삼귀사람(귀현, 귀곡, 귀산 세 마을 사람을 일컬음) 하면 섬[島]사람부터 연상되었다. 마을 앞은 바다요 뒤는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타지 사람들에겐 섬 아닌 섬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귀산동의 면적은 10.6㎢에 인구는 3700여 명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0여 세대이고, 나머지 사람...
-
석교마을로 가는 길은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원과 마산의 경계인 봉암다리에서 적현로를 따라 두산중공업을 가로지르면 곧바로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해안도로의 군데군데는 늘상 낚시꾼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오른편으로는 무학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마산시내가 한눈에 잡히며, 지척에는 마산만의 명물인 돝섬의 아름...
-
“당시는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국민학교 운동장 한편에 고구마밭이 있었고 운동장 주변에는 피마자(아주까리)를 심고 매일 가꾸었는데, 세월이 지나 알고 보니 일본놈들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제. 심지어는 소나무의 진까지 긁어 모아서 학교로 가져오게 하기도 하고 ‘도둑놈(도둑놈같이 식물의 열매가 몸에 달라붙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이라는 풀의 열매까지 가지고 오게...
-
현재 귀산본동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60년대 진해에 와 있던 미고문단과 색다르게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당시는 바닷가 마을이라 마을 부녀자들은 물때만 되면 바닷가로 몰려 나가 조개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구입하고, 또 자식들 학비를 조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경기도 어디에서 미군이 구호물자를 영세민들에게 공짜로 나눠 준다는...
-
예전이나 지금이나 석교마을은 물론이고 귀산본동까지도 생업의 터전은 바다로, 이 바다를 텃밭으로 일구며 살아오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만 하더라도 조개 값이 나락 값의 배를 넘었으니 매일 조개를 캘 수 있는 마을 앞의 갯벌은 사람들에게 삶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인근의 마산에 사는 부인들도 통통배를 타고 이곳에 와서는 낚시 미끼로 인기가 있는 각종...
-
석교마을과 귀산본동에는 호롱불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 지역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대부분의 집에서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그런데 색깔이 뿌옇기만 하고 밝지는 않던 호롱불 대신 경유를 쓰는 호야(램프)로 불을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값비싼 석유램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사는 게 힘들었던 그 시절에 호야를 값싼 비용으로 사용할 수...
-
석교마을 사람들은 물론 귀산본동 사람들은 누구나 웅남호에 대한 추억들을 갖고 있다. 황포돛배는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언제부터 언제까지 운항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긴 시간이 지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린 것이다. 황포돛배와 동력선인 웅남호의 교체 시기도 사람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황포돛배가 더 이상 운항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