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마산 지역이 ‘민주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대적 사건과 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서울에서는 여운형의 주도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조선 건준]가 결성되었다. 8월 17일 발표된 조직 명단을 보면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 부장 최근우, 재무 부장 이규갑, 조직 부장 정백, 선전 부장 조동호, 무경 부장 권대석 등 사회주의 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노동 운동가. 노현섭(盧玄燮)[1920~1991]은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하였다. 8·15 해방 직후 마산 보통 상업 학교[현 용마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6·25 전쟁 이후 3개 부두 노조를 통합한 단일 지역 노조인 대한 노총 자유 연맹 마산 부두 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54년 마산 자...
6·25 전쟁 당시 마산 지역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 규명을 위한 활동. 1960년 4·19 혁명 직후, 그동안 이승만 정권에 억눌려왔던 6·25 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마산 지역을 시작으로 경상남도 통영·김해·밀양·동래 등 도 내 인근 지역에서도 속속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경상북도 대구·경주·경산에 이어 서울에서 전국 유족회까지 결성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1960년 이후 일어난 혁신 운동. 마산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야당 도시’라 불릴 정도로 혁신 세력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 1952년 8월 5일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마산의 유권자들은 진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출마한 조봉암 후보에게 1만 1262명이 표를 몰아줬다. 당시 마산의 유효 투표자 수는 3만...
1910년 설립된 부산 본감 소속의 마산 분감으로서 현재 창원 교도소의 전신.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시설을 갖춘 최초의 감옥은 1908년에 문을 연 서대문 형무소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법과 감옥에 관한 업무를 행사하게 된 것은 1907년 7월 한일 협약에 따른 것이다. 이완용과 조선 통감이 사법·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조인했고 이에 따라 일제는 1907년 11월 통감부 재판소...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창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시기. 1. 마산 1914년 3월 1일 부·군제의 실시와 함께 창원부 외서면 마산포 일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마산포의 인구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미달하였다. 그러나 마산항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대일 교역상의 입지적 특성이 중시되어 부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