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린
-
1775년에 간행된 안동 출신 이유장의 시문집. 이유장(李惟樟, 1625~1701)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5대조 이훈(李薰)이 처음으로 풍산(豊山)에 입향하였다. 할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이진(李珍)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이정발(李廷發)이다.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의 딸이다. 손자 이재기(李載基) 등이 1706년(숙종 32)에...
-
1783년 간행된 조선 중기 문신 김해의 문집. 근시재 김해(金垓, 1555~1593)는 이황의 문인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아들로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1588년에 사마시에, 1589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아버지는 김필신(金弼臣),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로 통덕랑 이천표(李天標)의 딸이다. 김간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에서 태어났으며,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01년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연(景淵), 호는 하재(下齋). 아버지는 김필순(金弼淳)이고, 어머니는 여주이씨로 첨지중추부사 이정진(李鼎搢)의 딸이다. 부인은 한양조씨로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후손인 학파(鶴坡) 조성복(趙星復)의 딸이다. 김우수(金遇洙, 1804~1877)는 어려서부터 의표(儀表)가 단정하였고, 겨우 말을 할...
-
조선 후기 이진동이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경상도의 의병들에 대한 기록을 모은 책.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지 60년 뒤인 1788년, 정조는 안동의 의병장 류승현(柳升鉉)과 권만(權萬)에게 관작을 내리고 경상감사 등 관원들에게 의병의 사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경상감사 등 관원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이진동이 도내 각지의 인사들과 함께 각...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수약(守約), 호는 삼여당(三餘堂). 고려 말에 안동의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정착한 배상지(裵尙志)의 후손이다. 배상지의 7세손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인 배삼익(裵三益)의 5세손이다. 고조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였던 배용길(裵龍吉), 아버지는 배면(裵冕)으로 이현일...
-
1734년에 간행된 안동 출신 류진의 문집. 1734년에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후손인 류위하(柳緯河)와 류성화(柳聖和)가 편집, 간행하였다. 저본은 안동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다.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표제는 수암선생문집(修巖先生文集)이다. 행자(行字)는 10행 20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6.1㎝, 세로 20.5㎝이다. 어미는 상하내향화문어미...
-
1982년 간행된 안동 출신의 광산김씨 예안파 김연 계열의 주요 인물들의 저술을 모아놓은 문집. 『오천세고(烏川世稿)』는 조선 중기와 후기 안동 오천의 광산김씨 예안파 김연(金緣, 1487~1544), 김부필(金富弼, 1516~1577), 김부의(金富儀, 1525~1582), 김해(金垓, 1555~1593), 김광계(金光繼, 1580~1646), 김순의(金純義, 1645~1714)...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하경(夏卿), 호는 고산(孤山)·마애(磨崖)·나암(懶庵)·우원(芋園)·우포(芋圃)·사익당(四益堂). 5대조 이훈(李薰)이 처음으로 풍산(豊山)에 입향하였다. 할아버지는 주부를 지낸 이진(李珍), 아버지는 통덕랑 이정발(李廷發),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의 딸이다. 이유장은 경상부 안동...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누각. 함벽당은 조선 명종 때의 무신 절충장군(折衝將軍) 강희철(康希哲)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세워 거주하던 곳이다. 그 후 옥봉(玉峰) 권위(權暐, 1552~1630)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함벽당(涵碧堂) 류경시(柳敬時, 1666~1737)의 소유로 바뀌었다. 처음에 집의 이름은 강희철의 호를 따라 함경당이라 하였는데, 영양 주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