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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B03000203
영어음역 Jeongam Jo Gwangjo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기와집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선영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암 조광조는 800여회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불과 4년 정도의 벼슬길에 있었던 정암이 조선조 역사를 통하여 그렇게 자주 언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암의 사상적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한국 유학사상에서 도학을 확립시킨 지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주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정암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았으며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秕)·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고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는데,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세력이 왕에게 정암의 신진사류를 사실이 아닌 일을 꾸며 고발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훈구세력의 탄핵과 정암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낀 왕에 의해 사사의 명을 받게 되었다.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는 정암의 계획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사형을 당했지만, 그 뒤 선조 초 억울하게 죽은 죄를 풀어주고,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되살려 주었다.

정암은 38세라는 비교적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우리 역사상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바치고, 삶을 가장 실천적으로 보여준 도학자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이자 조선조 사림의 최고자로서, 근세 이후 한국정신사에 절대적인 영행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학문하는 입지가 높았고, 그 의지대로 엄정한 길을 걸어 삶 전체에서 이해·득실·생사·귀천에 대한 인식과 태도 남달랐다. 도와 진리, 책임의식과 생명정신이 하나로 통합된 삶이었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 하는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와 같이 정암은 인자한 인간성과 명철한 정신, 그리고 강건한 용기를 온전하게 갖춘 최고의 선비이자 도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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