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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710
한자 喪禮
영어음역 Sangnye
영어의미역 Funerary Practic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준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평생의례
시작시기/연도 연중
의례시기/일시 연중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장사 지내는 예법.

[개설]

상례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로,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는 초종례부터 시신을 처리하는 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상주들이 현실 사회로 복귀하는 매장 후부터 탈상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용인 지역에서는 유교식 상례가 일반적으로 행해져 왔으나, 오늘날에는 유교식 외에 여러 양식이 섞여 행해지며, 절차도 빠르게 간소해지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용인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유교식 상례는 『사례편람(四禮便覽)』 등과 같은 유교 예법서들의 규정에 따라 18~19단계의 절차를 따르면서도 생활에서는 몇 가지를 묶어서 행하여 왔다. 실제 마을조사를 통하여 볼 때, 지역의 노인층들은 상례 절차를 초종, 염습, 성복, 조문, 치장, 발인, 급묘, 반곡, 우제, 졸곡, 소상, 대상 등 대략 열두 가지 절차로 구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차들은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하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일년상을 하는 관습 속에서 지켜졌다. 그러나 1970년대를 기점으로 상례 실행에 급속한 변화가 초래되기 시작하였다. 즉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어난 새마을운동과 1973년의 대통령령에 의한 「가정의례준칙」의 발령으로 간소화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이후 상례의 전체 절차에서 매장 후 우제에서 탈상까지의 상제 의례의 기간, 즉 사자의 혼령을 조상신으로 만드는 의례들이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상복의 착용 문제나 상례 실행의 많은 것을 대행하는 장의사라는 전문 직업의 확대 등에서도 변화가 왔다. 3년상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탈상의 시기도 다양화되어서 삼우제를 지내고 하거나 사십구재나 백일재 이후에 하기도 한다.

상복은 이전에는 오복제도에 따라 복인들이 입는 상복의 재질이나 봉제법이 각기 달라서 복잡했지만 오늘날에는 두건이나 광목으로 두루마기와 띠 정도만 갖춘다. 그래서 친족이라도 굴건제복을 입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검은 양복에 건과 행전만 차기도 한다. 1930년대 무렵부터는 탈상하기 전까지 상중에는 모자와 상의에 베 헝겊으로 만든 상장(喪章)을 달고 다녔는데, 1970년대에 이후로는 점차 사라져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또한 임종을 집안에서 맞이하는 것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에서는 초상이 나면 상가를 중심으로 가족과 친족,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일을 치렀다. 그래서 초상에 대비하여 마을마다 상포계를 운영하였으나 지금은 부조로 대신한다. 전문 장의사가 늘어나면서 초종에서 발인까지의 장소가 마을을 벗어나 장례식장이나 병원 영안실 등으로 바뀌어 갔다.

오늘날 전문 장의사는 수시부터 매장까지의 일을 전담하다시피 하나, 제를 지내고 축문을 읽는 것은 여전히 상주가 맡아서 하고 있다. 기독교식에서는 담임 목사가 상례 일체를 주관해 주고, 반혼제 대신 추도 예배로 상례 절차를 마무리한다.

[절차]

예전부터 용인 지역에서는 초종(초종~염습)·장송(성복~반곡)·상제(우제~대상) 의례의 순서 속에 대략 열두 가지 절차로 상례를 구분하여 행해져 왔다. 초종 단계에서는, 먼저 임종을 확인하면 염하기 좋게 시신의 손발을 곧게 펴서 묶는 수시를 행한다. 수시 후 키 위에 흰 종이를 깔아 사자상을 차리고 초혼을 한다.

이와 함께 호상을 정하여 상중의 역할 분담 및 초상이 났음을 알리고 상장제구를 마련한다. 전통사회에서는 대개 2~3일째에 시신을 목욕시켜 옷과 이불로 싸서 입관하여 염습을 마침으로써 초종 단계가 마무리되었지만, 삼일장이 일반적인 오늘날은 이러한 과정이 대부분 임종 당일에 이루어진다.

장송 단계는 성복, 조문, 치장, 발인, 급묘, 반곡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성복을 함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고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즉 남녀 상제들은 오복제도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상복을 입고 비로소 조문을 받는다. 그리고 장지를 정하고 신주도 제작하고 상여를 갖추는데, 상두꾼들은 발인 전날 행상을 준비하게 된다. 영구를 상여에 옮겨 실어 상여가 집을 떠나는 의식인 발인을 하고 장지로 가는 중간에 보통 두 번의 노제를 지내기도 한다.

장지를 향하여 가는 상여 행렬은 앞쪽부터 방상-명정-공포-영차-상여-상주-복인-조문객 순이다. 장지에 이르러 하관시에 맞춰 하관을 하는데, 용인 지역에서는 이때 대부분 퇴관을 한다. 봉분을 올려 평토제를 지내면 장례의 절차는 끝난 것으로 인식한다. 매장 후 혼백을 집으로 모셔 가는 절차인 반곡은 상여가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되돌아가서 행해진다.

상제 단계는 사자의 혼령을 조상신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우제, 졸곡, 소상, 대상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우제는 사자의 혼령을 위로하고자 매장 후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이며, 이 절차를 거쳐 혼백을 땅에 묻는다. 졸곡을 통해 무시곡이 조석곡으로 바뀌고 1주기가 되면 소상을, 2주기가 되면 대상을 치르고 탈상을 한다. 용인 지역 주민들은 보통 이주기 때 지내는 대상이 끝나면 상례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유교 예법서에서 정한 대상 후의 담제의 절차는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초상이 나면 상가는 마을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가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 간의 관계망이 나타나고, 사자가 살아생전 쌓아놓은 관계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가족의 범위를 넘어 친족집단과 이웃들이 나서서 상례의 여러 절차에 수반되는 필요한 일들, 예를 들어 상장제구 준비, 상복 만들기, 상여 매기, 조문객 접대, 장지를 조성하는 산역(山役) 등의 일을 처리해 준다.

이런 일을 위하여 용인 지역 주민들은 평소에 상계·상포계·연반계라는 이름의 계조직을 운영해 왔으며, 이것은 마을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웃마을 사람들까지도 확대하여 조직되는 경우도 많았다. 마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집집마다 연중 세 말에서 다섯 말 정도의 쌀을 적립하여 초상에 대비하였다. 곡식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것 외에 상여를 빌려주고 산역을 도우는 것도 계원들의 중요한 몫이었다.

상여가 있는 마을은 ‘곳집’이라고 하는 상여 보관 시설을 마을 귀퉁이에 별도로 두었으며, 오늘날에는 대체로 마을회관에다 보관을 하고 있다. 수원시와 인접하여 있는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성복동의 경우 상여가 없는 마을은 행정구역에 상관없이 광교산 너머 수원시에 속한 마을에서 상여를 빌려다 썼다. 대체로 용인 지역에서는 상두꾼이 10명 내외로 구성되어 ‘소틀’, ‘소여’라고 하는 작은 상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계 조직을 통한 상부상조는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발인 전날이 되면 상두꾼들이 모여 다음날 있을 행상을 준비하게 된다. 그런데 용인 지역에서는 행상에 앞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빈상여놀이’를 행하지 않았다. 다만 이웃 마을에서 상여를 빌려올 경우 마을 입구에서 조립을 하여 상가까지 매고 가면서 실제 행상 때의 행위를 간단히 흉내내는 놀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는 상가의 일가에 들러서 술값 정도의 푼돈을 받아내 상두꾼들의 허기를 채우는 식이다.

용인 지역에서는 또한 반혼에 이어 우제 과정이나 우제를 지낸 후에 사자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을 폭넓게 행하였다. 즉 초우제를 지내고, 이날 저녁 무당을 불러 사자의 저승천도를 기원하는 혼풀이굿을 행하였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자리걷이’ 혹은 ‘뒷걸이’라고 하였다. 집안에 따라 삼우제 후에 자리걷이를 하는 곳도 꽤 있었다. 무당은 징과 꾕과리를 치면서 사자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집 안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우제에서 대상까지의 절차를 겪으면서 사자의 혼령은 조상신으로 승화된다. 대상을 끝으로 탈상을 하면 전체 상기가 마무리되고, 상제는 비로소 일상생활로 복귀를 하는데, 예전에는 상장제구들, 특히 굴건제복은 쓰고 나서 바로 태워 없애기도 하고 보관하면서 다시 쓰기도 한다. 나아가 이웃간에 상을 당하면 서로 빌려주기도 한다. 때때로 뜯어서 보자기로 재활용하는 집도 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상례는 죽음을 다루는 절차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많은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 용인 지역에서 주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된 금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어머니와 관련한 금기가 많은 편인데, 일례로 “밥사발을 포개 놓으면 겹상 치른다”는 금기 사항이 있다.

여기서 겹상이란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상을 뜻한다. 예부터 상주는 ‘불효자’라는 관념이 많이 남아 있어서 상주가 지켜야 할 금기도 많은 편에 속하며, 이것은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다. “상중에는 머리를 빗지 않는다”, “상중에는 빨래를 하지 않는다”, “상중에는 손발톱을 깎지 않는다” 등의 금기는 철저히 지켜졌다.

그외에 상중에 하얀 빨래를 늘어놓으면 집이 망한다고 생각하거나 이웃에 상가가 있을 때 바느질하는 것은 이웃 상가와 같이 상복을 만드는 것으로 여겨져 금기시 하였다. 사전에 부정을 예방하기 위한 금기도 다수 존재하였다. 상여가 우물 앞을 지나갈 때는 우물의 물이 안 난다고 하여 미리 거적을 덮어 두기도 하는 행위가 그러한 사례이다.

오늘날에는 상례와 관련한 금기의 풍속이 급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주민들 다수가 이러한 금기를 미신적 행위로 여기고 있으며, 게다가 유교식 상례와 무관한 종교신자들은 이에 대한 관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초상집에 다녀오면 소금을 뿌린다”, “집에 들어설 때는 왼발부터 들여놓는다”, “화장실부터 들어간다”든가 하는 등의 도시 지역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는 금기조차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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