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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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谷齋重建記 |
영어음역 | Namgokjae Junggeongi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Renovation of Namgokjae Shrin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93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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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황(金榥)[1896~1978] |
창작연도/발표연도 | 1957년 8월![]() |
1957년 김황이 이석지의 재사인 남곡재의 중건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남곡재 중건기(南谷齋 重建記)」는 이석지의 후손인 이병운(李柄運)의 부탁으로 영남의 대학자 김황(金榥)[1896~1978]이 남곡재의 중건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記文)이다. 이석지(李釋之)는 고려 후기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조를 열고자 했을 때 적극 반대하며, 여러 학사들과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을 고집하였다. 급기야 두문동에까지 화가 미치자 용인의 남곡으로 옮겨 와 은거하였는데, 자신의 호를 ‘남곡’이라 한 것도 바로 이곳에 은거하면서부터이다.
남곡재가 퇴락하여 중건하게 된 경위와, 남곡에 은거하면서 대의(大義)를 지킨 이석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두문동 72현 같은 이가 모두 명교(名敎)를 붙들어 심어서 간책에 그 명성이 자자하니, 선생이 실로 그 한 사람에 해당한다. 이에 남곡 한 구역을 은둔하며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하여 평생 이 골짜기를 나오지 않았다. 아! 또한 시대가 그러하지 않은가. 묘소 아래에는 옛날부터 재사(齋舍)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이어서 집 두어 칸을 지었으나, 또 참혹한 병란으로 소실되었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상의해서 중건하여 그 옛날 제도대로 다시 보존하게 되었는데, 옛날보다 더 확장하여 행랑과 부엌, 창고 등을 모두 갖추었다. 해마다 이곳에 함께 머물며 주선하고, 오르내림에 삼가는 마음은 추연하여 선생을 뵙는 듯이 하였다.……"
「남곡재 중건기」는 비록 근래에 쓰여진 기문이긴 하나, 이색(李穡)의 「남곡기(南谷記)」, 서거정의 「효우정기(孝友亭記)」와 함께 남곡이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당대의 저명한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명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