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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립 창의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116
한자 金元立倡義碑
영어음역 Kim Wonrip Changuibi
영어의미역 Memorial Monument for Kim Wonrip's Righteous Army
이칭/별칭 갈천공 병자호란창의근국기념비(葛川公丙子胡亂倡義勤國紀念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갈곡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인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념비
양식 방부이수형
건립시기/일시 1985년 8월 15일연표보기
재질 오석
소재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갈곡마을
소유자 경주김씨 갈천공파 종친회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갈곡에 있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 김원립의 기념비.

[개설]

경주김씨 계림군 김균(金稛)의 9세손이었던 갈천 김원립은 1590년(선조 23)에 증 참판 김성진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3년(광해군 5)에 등과하였고, 대과를 거쳐 능주목사가 되었다. 김원립은 능주목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649년 9월 7일, 김원립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용소무령원종공신 1등에 추증하였다. 김원립의 임지였던 능주에는 지금도 선정비가 있다.

선정비에는 “마음은 빙옥과 같고, 덕은 춘추를 겸하였네(如心氷玉 德兼春秋)”라고 쓰여 있다. 김원립은 용인에 낙향하여 거족을 이루었고, 그가 살던 마을은 그의 호를 따라 마을 이름을 갈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건립경위]

김원립 창의비는 갈천공파 종중에서 김원립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1985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위치]

김원립 창의비는 원래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구갈리 국도 42호선 변에 있었으나 구갈지구 택지개발 공사로 인하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갈곡(현 강남마을) 강남대학교 입구 좌측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형태]

방형의 비대석은 화강암이며, 상변에는 16판의 연판문을 조식하였고, 가첨석에는 이수를 조식하였다. 비신은 오석이다.

[금석문]

김원립 창의비의 제목에는 ‘갈천공병자호란창의근국기념비(葛川公丙子胡亂倡義勤國紀念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음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김원립 선생은 경주인으로 신라 경순왕 29세손이요, 조선개국공신 계림군 제숙공 의 9세손이며, 취수당 성의 제2자로 모자 대의를 충간 직소하다가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고, 종성부사에 이르렀으며, 1627년 강홍립의 난에 세자 남하에 자진 배종하였다.

병자호란 때 왕이 남한산성에서 농성 항전할 때 창의군을 조직·인솔하여 과천에 이르러 호병과 접전하여 5, 6백여 명 적을 참수하였다. 그러나 왕이 항복하여 남한산성 안과 협공지계가 무산됨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말미에는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 이강훈, 10세손 국회의원 현암 윤식 삼가 짓고, 13대 종손 석담 진구 삼가 쓰다.” 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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