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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17
한자 崔士庸
영어음역 Choe Sayong
이칭/별칭 관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변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1392년연표보기
몰년 1453년연표보기
본관 전주최씨
대표관직 첨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최사용(崔士庸)[1392~1453]은 세종대의 문신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당시의 석학인 완역재(玩易齋) 강대민(姜戴敏)과 문절(文節) 김담(金淡)과 교유하였다. 관직은 내외직을 고루 역임하면서 백성을 아끼고 바르게 다스려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관중. 증조부는 선부전서 최득평(崔得枰)이고, 할아버지는 전리판서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이다. 아버지는 참찬의정부사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이며, 어머니는 시중 이숭(李崇)의 따님이다. 부인은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참찬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딸이다. 형은 최사위(崔士威)·최사의(崔士儀)·최사규(崔士規)·최사강(崔士康)이고, 동생은 최사흥(崔士興)이다.

[활동사항]

최사용은 1419년(세종 1)에 상의원직장에 임명된 뒤 태창봉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당랑으로 발탁되어 왕자사부가 되었다. 1421년에 의금부도사를 거쳐 장악원주부와 용양위부호군·예빈시주부를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인 송화현감으로 나아갔다가 곧 신천군수에 이어 익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선정을 베풀어 녹피를 하사받았다. 1423년(세조 5)에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며, 곧 행대감찰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규찰하였다. 다음해 사복시판관·첨정을 역임하였다.

1425년에는 봉정대부형조정랑·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한성부판관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사간과 사헌부집의로 옮겼다. 이때 후궁이 총애를 받아 정치에 간섭하는 폐단이 있음을 직언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또한 “관료가 정무를 세우지 않고 정령을 준수하지 않으며 요행으로 승차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나라의 법과 기강이 크게 무너지니 속히 고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따랐다.

1430년(세종 12)에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푸니, 후에 고을 백성들이 선정비를 새겨 덕을 기렸다. 통정대부로 올라 통례원좌통례가 되었으며, 1434년(세종 16)에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39년(세종 21)에 군기시판사로 있으면서 사복시정을 제수받았다. 1441년에는 도총부대호군을 거쳐 중추부사상호군에 올랐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리에 있다. 묘갈(墓碣)의 비문은 여산(礪山) 송하영(宋夏英)이 짓고 썼으며, 1966년에 다시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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