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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916
한자 李在學
영어음역 Lee Jaehak
이칭/별칭 성중,지포,익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광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745년연표보기
몰년 1806년연표보기
본관 용인
대표관직 예조판서|공조판서|형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재학은 조선 후기 영조 대에서 순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이다. 대사간으로 재임할 때는 “오늘날 허다한 하자와 폐단을 이루 거론할 수 없습니다만, 그 병든 근원을 찾으면 오로지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실(實)이란 하나의 글자를 실행해나가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임금께 당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중(聖中), 호는 지포(芝浦). 아버지는 이숭호(李崇祜)이며, 아들은 이규현(李奎鉉), 손자는 이원명(李源命)이다.

[활동사항]

1770년(영조 46)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자(正字)를 거쳐 수찬(修撰)과 교리(校理)가 되었다. 1776년 경연의 시독관(侍讀官)으로 있으면서 주강(晝講)하는 자리에서 400년 동안 유지하여온 명분을 바르게 하고 기강 확립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활약한 후 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에 올랐다. 1795년(정조 20)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로서 의혹사건을 잘 처리하였다. 당시 척신인 김귀주(金龜柱)의 역모를 탄핵하여 나주로 유배시켰다.

1796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임할 때는 용인에 사는 과부 박씨가 밤중에 정조를 지키려고 간수를 마시고 죽은 사건을 알리어 정려(旌閭)를 받게 하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김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그 때 김귀주 일당을 공격하였고 산릉도감의 당상으로 있으면서 산역 공사를 지연시켰다가 벽파의 탄핵을 받아 가산(嘉山)·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순조 5)에 풀려났으나 곧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 살구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익헌(翼獻)이고, 후손들에 의해 『사대유고집(四代遺稿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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