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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74
한자 李世白
영어음역 Lee Sebaek
이칭/별칭 충정,북계,중경,우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원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35년연표보기
몰년 1703년연표보기
본관 용인
대표관직 좌의정|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仲庚), 호는 북계(北溪)·우사(雩沙). 파주목사 이정악(李挺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외증손이며, 외삼촌은 유명한 문곡공 김수항(金壽恒)이다. 아들 이의현(李宜顯)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부자 정승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용인이씨 가계 중 조선 후기에 대표적인 경화사족을 이룬 집안으로 유명하다. 다시 말해, 신충(병조정랑)계 후손으로 식년시 장원급제한 이사경(사간원대사간) 이후로 이후천(형조참의), 이후산(개성유수), 이세백(좌의정)·이세면(대사간), 이의현(영의정) 등 무려 문과 급제자를 61명이나 배출하였다.

[활동사항]

이세백은 예학(禮學)에 밝은 노론(老論)의 중심인물로서 국가의 중요 예론(禮論)에 깊이 참여하였다. 진사시에 급제한 뒤 의금부도사를 거쳐 홍천현감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이조좌랑·동부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언로 활동을 하였다.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는 백성의 어려움과 관리의 폐단을 보고하고 바로 잡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684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평안북도 안주 청천사에 있는 이원익(李元翼)의 사당에 함께 제사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대사간 등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도승지로 있으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유배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도승지로 복권되어 선혜청당상·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7년에 이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는데, 지방관의 인사를 엄하게 하여 관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1698년(숙종 24) 특명으로 우의정에 올랐고, 1700년(숙종 26)에는 좌의정이 되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하지만 17차례나 좌의정을 사직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때마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게 하여 6년간 곁에 두고 정사를 맡기었다.

1703년(숙종 29) 그의 졸기를 보면, “당시 나라에 길흉의 큰 예가 있으면 그 일을 모두 맡아주었는데 69세로 졸하니, 이 뒤로 조정의 의론이 더욱 분열되어 그칠 바가 없었다. 식자들이 탄식하기를 ‘만약 이상국(李相國)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비록 평소에 미워하는 자들도 그렇게 여겼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우사집(雩沙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73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22 영문 이름 수정 2012년 증보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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