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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35
한자 李喬岳
영어음역 Lee Gyoak
이칭/별칭 석음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원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53년연표보기
몰년 1728년연표보기
본관 용인
대표관직 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 호는 배우는 데 힘쓰고 시간을 아껴 매사에 부지런히 하라는 뜻으로 송시열이 지어주었다 한다. 고조부는 증직제학 병조정랑 이신충(李藎忠), 증조부는 증집의 정선군수 이영인(李榮仁), 조부는 증좌승지 이사익(李士益),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이후망(李堠望)이다.

[활동사항]

송시열과 동향으로 송시열의 자손들과 같이 가숙에서 학문을 익혔다. 1696년(숙종 22) 생원진사시를 거쳐 순안현령을 지내다가, 1705년 53세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때 숙종의 선위(禪位)를 막는 데 역할을 하였다.

1710년 3월에 지평 이방언(李邦彦)과 함께 소론인 판중추부사 최석정(崔錫鼎)을 배척하여 관직을 삭탈하게 하고, 최석정의 저서 『예기류편(禮記類編)』을 불사르게 하였다.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한 유생 곽경두(郭景斗)를 옹호하다가 정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12년 이후 정언·좌승지·수원부사·황해도관찰사 및 대사간·승지 등을 역임 하였으며, 1720년(경종 1)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경산·동래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예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형조참판과 이후 경기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사헌부대사헌의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지내다가 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분노하여 66세로 졸하였다.

[묘소]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 살구골에 묘소가 있다. 영의정 이의현이 묘갈을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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