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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30
한자 李景曾
영어음역 Lee Gyeongjeung
이칭/별칭 여성(汝省),송음(松陰),미강(眉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95년연표보기
몰년 1648년연표보기
본관 덕수(德水)
대표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성(汝省), 호는 송음(松陰)·미강(眉江). 할아버지는 절도사 이원, 아버지는 군수 이통(李通)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인 1624년(인조 2)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정언, 예조좌랑·병조좌랑을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당시 계운궁우제(啓運宮虞祭)때 부원군 이귀(李貴)와의 의견 차이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전적·정언·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을 가자 어사로서 호남에 내려가 식량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5~6년간은 양사의 지평·헌납·사간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에서 사서·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응교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이어서 검상을 거쳐 사인·형조정랑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 청주목사·응교·첨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환도 이후 도승지로 승격하고,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당상(軍功廳堂上)을 맡아 전국의 장사(將士)들의 공죄(功罪)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하여 침구할 기세를 보이므로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나갔다가 병으로 인하여 정직하였다가 16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에 조민(趙珉)이라는 인물을 잘못 등용하였기 때문에 찬배(竄配)되었다. 1646년에 지중추부사로 시관이 되어 시제를 시휘(時諱)에 저촉되게 잘못함으로써 이식(李植)과 함께 삭출(削黜)되어 강교(江郊)에 은거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경증은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있는데 묘비와 동자석, 망주석, 문관석을 갖추고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는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는데, 전액(篆額)은 대제학 남유용이 쓰고, 비문은 권상하가 짓고 글씨는 윤양후가 썼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2.31 오탈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 항목에 기초하여 "유전(柳琠) → 유전(柳㙉)"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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