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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22
한자 尹行恁
영어음역 Yun Haengim
이칭/별칭 성보,방시한재,석재,문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장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762년(영조 38)연표보기
몰년 1801년(순조 1)연표보기
본관 남원
대표관직 양관대제학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윤행임(尹行恁)[1762~1801]은 시파(時派)의 중추적인 인물이다. 시파와 벽파(辟派)의 당쟁이 극심하였던 정조 대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탄핵 또한 빈번하여 자주 유배 생활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보(聖甫), 호는 방시한재(方是閑齋)·석재(碩齋). 조부는 용안군(龍安君) 윤종주(尹宗柱)이며, 아버지는 익찬(翊贊) 윤염(尹琰), 형은 윤행엄(尹行儼)이다.

[활동사항]

1782년(정조 6)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명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 민치화(閔致和)와 함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는 탄핵을 받아 성환역(成歡驛)에 유배되었다. 1789년(정조 13)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복직되었다가 1790년(정조 14) 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로 있을 때 벽파의 공격으로 고양에 유배되었다. 1792년(정조 16) 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98년(정조 22)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정조가 직접 ‘현숙태부인지장(賢淑太夫人之藏)’이라는 어필을 내릴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1800년 정조 사후 제술관으로 임금의 시장(諡狀)을 썼다. 순조 즉위 후 도승지·이조판서에 올랐고 이어서 대제학이 되었으나,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키자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사주로 서학을 신봉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신지도로 안치되었다가 참형되었다. 이후 헌종 초에 신원되었다.

[학문과 사상]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설을 신봉하였으며 신독(愼獨)에 충실하여 “나 같은 소자가 성현의 글을 읽고 그것을 깊이 체득해 본받고 실천하지 못하니 참으로 자포자기하는 것이라 하겠다”라 하였다. 또한, “알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도 기만이요, 배우고도 힘써 행하지 않는 것도 기만이다. 누구를 기만하는 것이냐 하면 마음을 기만하고, 하늘을 기만하며, 선왕을 기만하는 것이다”라 하고 자신의 당호를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의 ‘불기헌(弗欺軒)’이라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방시한집(方是閑集)』, 『동삼고(東三攷)』, 『석재고(碩齋攷)』가 있고, 정자와 주자의 설을 바탕으로 경전에 있는 제가(諸家)의 설을 교정한 『신호수필(薪湖隨筆)』이 있다. 편서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이충민공실기(李忠愍公實記)』 등이 있으며, 유필로는 수원 화산의 『건릉지(健陵誌)』가 있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헌종 초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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