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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89
한자 吳允謙
영어음역 O Yungyeom
이칭/별칭 여익(汝益),추탄(楸灘),토당(土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영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559년연표보기
몰년 1636년연표보기
본관 해주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헌부 감찰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의 손자이고,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의 아들이며, 부인은 이응화(李應華)의 딸이다.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문음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시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부수찬·이조좌랑·지제교·부교리 등을 지냈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여 있던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으며,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하였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여,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한편으로는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그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하여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613년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물러났다가 1622년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봉행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학문과 사상]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척의가 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있어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부묘반대론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연해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함으로써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또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그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며,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만주어에 정통한 역관 신계암을 후원하여 만주어 교재를 편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하여 『동사일록(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 5번지에 있으며, 1647년에 김상헌(金尙憲)이 찬하고 송준길(宋俊吉)이 쓴 묘갈이 있다.

[상훈과 추모]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09 행정지명 현행화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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