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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60
한자 沈之源
영어음역 Sim Jiwon
이칭/별칭 원지(源之),만사(晩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93년연표보기
몰년 1662년연표보기
본관 청송(靑松)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이다. 증조부는 심금(沈錦), 할아버지는 심종열(沈宗悅), 아버지는 심설(沈偰)이다. 외조부는 청원도정(靑原都正)이었던 이간(李侃)이고, 부인은 윤종지(尹宗之)의 딸이며, 그의 아들 심익현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해 효종과는 사돈관계였다.

[활동사항]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면서도 대북(大北)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3년 검열에 등용된 뒤 저작 겸 설서·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집의·교리·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윤계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초에는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심익현(沈益顯)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인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으며,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의 제6대 원장을 지냈다.

[저술 및 작품]

글씨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저서에 『만사고(晩沙稿)』가 있다.

[묘소]

그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데, 비문은 김수항이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과 전액을 써서 1686년(숙종 12년)에 건립하였다. 1992년 12월 31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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