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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35
한자 撒禮塔
영어음역 Sallita
영어의미역 Salietai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몽고 장수
출신지 중국 원나라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232년연표보기
대표관직 원정군 사령관

[정의]

고려 후기 처인성을 공격해온 원나라 장수.

[활동사항]

살리타는 1231년(고종 18) 몽고 사신 저고여(箸古與)가 고려인에게 살해되었다고 여겨 함신진(咸新鎭)을 넘어 고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구주(龜州)에서 박서(朴犀)에게 패하였고, 다시 군대를 정비하고 개경 성의문(省義門) 밖까지 침공해왔다. 이에 고려는 살리타가 있는 안북부(安北府)[安州郡]까지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게 하였다.

1232년 1월 제1차 고려와 몽고의 강화교섭이 성립되어 후퇴하였으나, 몽고는 고려에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특히 당시 고려의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는 강화도에 천도하여 몽고의 침략에 끝까지 항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6월 17일 강화 천도를 단행하고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 및 군인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몽고는 그 해 8월 다시 살리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고려 침공을 재개하였다. 10월 안북성에 군사를 주둔시킨 살리타는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자신은 제4군을 이끌고 개경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 한양성을 함락시키고 11월 중순에는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다. 살리타는 제4군의 주력을 강화도 맞은편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처인성으로 남진하였다.

처인성은 당시 수주(水州)[수원]에 속한 곳으로서 양인보다 천대받던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둘레 약 400m의 작은 토성으로 이 때 처인성에서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과 승장 김윤후를 비롯한 승병들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12월 16일 몽고군은 살리타의 지휘 아래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처인성 동문 밖 언덕에 매복해 있던 고려군에게 기습을 당하였고, 자신도 승려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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