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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674
한자 金堉
영어음역 Kim Yuk
이칭/별칭 백후(伯厚),잠곡(潛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청풍
성별
생년 1580년연표보기
몰년 1658년연표보기
본관 청풍(淸風)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이다. 증조부는 김덕수(金德秀), 할아버지는 김비(金棐), 아버지는 김흥우(金興宇)이고, 외조부는 조희맹(趙希孟)이다. 아들은 김좌명(金佐明), 손자는 김석주(金錫胄)이다.

[활동사항]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광해군 2)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이른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에 은둔,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인조 초반에 음성현감·전적·병조좌랑·지평·정언·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음성현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627년 청(淸)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고, 체찰사 김류(金瑬)를 수행하여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1632년 인목대비가 죽자 장례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의 관원이 되었고, 1636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明)나라에 갔다. 1638년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감사로 나가서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 상황을 점검하였다. 1643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고, 겨울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원손을 모시고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평안도 일대의 사신접대 폐단을 없애는 데 애썼다.

1646년 강빈(姜嬪)의 처벌에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체직되었다. 1649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654년(효종 6)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忠烈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사상]

그는 가평 잠곡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목격한 백성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이해와 각 지방의 수령·감사로 여러 번 재직한 경험을 토대로 관직에 있는 동안 줄곧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1623년 음성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조정에 대해 부세를 재촉하지 말고 요역을 감면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에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전쟁의 참화와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공격할 때를 대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고위직에 있던 인조 말년과 효종대에는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극심한 가운데, 그들에게 해마다 바치는 세폐와 북벌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 백성에게 집중된 시기였다. 여기에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가뭄·홍수·풍해·지진 등 각종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위축된 백성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민심의 이반을 막는 것을 국왕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하였다. 대동법은 바로 그 해답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는 노력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또 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만을 유통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서 찾았다.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보장함으로써 국가기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수차(水車)의 사용 등 농사기술의 개선, 수레의 사용, 시헌력 사용을 통한 역법의 선진화를 주장하고, 기근 등 각종 재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할 목적에서 『구황촬요(救荒撮要)』·『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하였다. 주목되는 것으로 가뭄 등의 재난을 미리 예방하는 방도로서 서울의 각 개천을 준설하자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는 주자학적 명분론이 강조된 17세기 후반의 분위기에서 보기 드문 개혁 정치가였다.

[저술 및 작품]

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도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청풍김씨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05년(숙종 31) 그의 학덕과 유풍을 기리기 위하여 잠곡서원이 창건되었고 1707년에 사액되었다. 개성의 숭양서원, 양근의 미원서원, 강동의 계몽서원, 청풍의 봉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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