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47 |
---|---|
한자 | 孔瑞麟 |
영어음역 | Gong Seorin |
이칭/별칭 | 희성,응성,휴암,문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영의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곡부). 자는 희성(希聖)·응성(應聖), 호(號)는 휴암(休巖). 창원공씨의 시조인 공소(孔紹)의 5대손이자, 공숙(孔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공의달(孔義達)이다. 어머니는 죽산 박원인(朴元仁)의 딸이며, 처는 파평 윤영세(尹永世)의 딸이다.
공서린은 1507년(중종 2) 진사시를 거쳐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낭관과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으며, 1519년 좌승지로 재직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했는데, 그 날 밤 입번 승지로 있다가 하옥되었으나 다음날 풀려났다.
이 때 시사에 대해 격분하여 재상을 공격하고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파직은 당하지 않았으나 심정(沈貞)과 허항(許沆)에게 미움을 받아 중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김안로(金安老)와 채무택(蔡無擇)이 집권했을 때 배척을 당해 황해감사로 나갔는데, 소장(疏狀)을 올려 당인(黨人)이 죄가 없다는 것을 극력 말하다가 관작을 삭탈당했다. 1522년 공조참의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1537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공서린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권발·김정국과 교유했으며, 천성이 말수가 적고 단아하고 신중하였으며, 강직하여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 있으며, 공순택(孔順澤)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1792년(종조 16) 유교 숭상책에 따라 조선에 사는 공자의 후손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여러 후손들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고 절의를 지켰다 하여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통으로 삼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