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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단적 금령역 침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26
한자 哈丹賊金嶺驛侵寇
영어음역 Hapdanjeok Geumnyeongyeok Chimgu
영어의미역 Invasion of Hapdan Enemy into Geumneyong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대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고려 후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관련인물/단체 합단

[정의]

고려 후기 용구현(현 용인시) 금령역에 원나라의 합단이 그 무리를 이끌고 침입한 사건.

[발단]

합단은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 세조(世祖) 때 반란을 일으켰던 내안(內顔)의 무리에 속한 부장이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만주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萬帶)에게 패배한 합단은 무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고려 동북면에 침입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기에 군대다운 군대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합단적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고려 정부가 취한 조치는 백성들에게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전부였다.

[경과]

원은 고려만의 힘으로 합단적을 물리칠 수 없다고 보고 평장사 설도간 등이 이끄는 보병과 기병 1만 3000명의 원군을 파견하였고, 고려 왕과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합단적은 1291년(충렬왕 17) 정월에 철령을 넘어 강원도로 난입하고 양근성을 함락시켰다. 침략군은 원주를 공격하였지만 과거 공부하는 향공진사 원충갑 등의 반격으로 패배해 물러갔다. 합단적은 개경 일대에도 출몰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곡주, 충주 등지에서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던 중 나만알이 이끄는 1만 명의 원군이 원에서 추가로 파견되어 합단적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합단적은 이천 일대에까지 출몰하였고, 이에 따라 용인 지역도 위태로운 형세였다.

합단적을 추격하던 설도간의 대군은 1291년 4월 금령역에 머물렀다. 금령역용구현에 속한 역으로서, 이로 미루어보아 용인 지역에도 합단적이 출몰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5월 초하루 합단적이 충청도 연기현에 주둔하자 설도간 대군과 고려의 삼군은 정좌산 아래에서 연합하여 합단적을 대패시켰다. 합단적은 군대를 정비해 다시 도전하였지만 고려군에 재차 대패하였다.

[결과]

합단적은 원의 군사와 고려군에 의해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고려에 파견된 원의 정부군도 모두 귀환하였다. 합단적의 살아 남은 병력들은 소부대로 쪼개져 흩어졌지만 고려군에게 소탕당했다.

용인 지역이 합단적에게 입은 피해 규모는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용구현금령역합단적과의 대회전인 연기 전투를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합단의 군사가 공주강에 이르렀을 때 적의 시체는 30여 리에 걸쳤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많았다. 이에 합단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였고, 합단적의 침입은 1년 반 만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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