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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15
한자 丙子胡亂
영어음역 Byeongja Horan
영어의미역 Manchu Invasion in 1636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636년 12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37년 1월 30일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이시방|김준룡

[정의]

조선 중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

[역사적 배경]

1627년(인조 5) 후금(後金)[뒤의 청나라]의 1차 침입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친 후금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조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636년(인조 14) 12월 9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왔다.

[발단]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하여 평양을 거쳐 개성에 이르렀다. 인조는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기자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군사 1만 3000명으로 성첩을 지키도록 하고, 각도에 알려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하였다.

[경과]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각도 감사와 병사들에게 근왕병을 모집하여 구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각 고을 수령들에게 명하여 근왕병을 모집한 다음, 1636년(인조 14) 12월 29일에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벽암(碧巖) 각성(覺性)도 각각 1천여 명씩의 승군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이끌고 근왕 대열에 합세함으로써 전라도 근왕병의 수효는 8천여 명에 달했다.

이시방김준룡은 1637년 1월 1일 직산에 도착하여 남한산성에 장계를 띄우고 곧바로 지금의 용인 양지 방면으로 향했다. 1월 2일에 양지에 도착한 이시방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먼저 남한산성으로 진군하게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1월 4일, 병사 김준룡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 남쪽 1백 리 지점인 용인의 광교산(光敎山) 방면으로 진출했다. 광교산 7부 능선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과 화약 등 군수 물자를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춘 다음 군관을 시켜 남한산성으로 장계를 올렸다.

한편 1월 2일에 험천현(險川峴)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한 청나라 장수 양굴리[揚古利]는 광교산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여 광교산과 남한산성을 차단하는 한편 광교산 일대를 둘러싸고 총공격을 해 왔다. 1월 5일에는 온종일 전투가 벌어졌고 여러 차례 근왕병 진영을 공격하였다.

전라도 근왕병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진(方陣)을 펼쳐서 맞섰다. 진영의 주변에 목책을 구축하고 제1선에 포수, 2선과 3선에 궁병과 창검병을 배치하였다. 그런 다음 청군이 공격해 오면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퇴각하면 궁병과 창검병이 그 배후를 쳐 큰 전과를 올렸다. 김준룡 부대는 방마다 횃불을 들고 공포를 쏴 그들이 광교산에 진출해 있다는 것을 남한산성에 알렸다. 이곳에서의 전투가 여의치 않게 되자 양굴리는 1월 6일 전군을 광교산 공격에 투입하여 조선군 진영을 압박했으나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청군의 일부가 동남쪽 방어 진지를 뚫어 조선군 진영 안으로 들어오자 혼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양굴리가 사살되었다.

[결과]

장수가 사살되자 청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와해되었고, 조선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반격하여 대파시켰다. 청군은 이 전투로 병력의 태반을 상실하고 광교산 동쪽 10리 밖으로 패주하였다. 이에 김준룡 부대의 참모들은 청군이 대규모로 복수전을 해 올 것이니 광교산 주변 계곡 일대에 복병을 두고 항전하자 하였으나 김준룡이 그 병력을 수원 방면으로 퇴각시키니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양지에 머물면서 청군을 공격하려고 준비중이던 전라감사 이시방김준룡 부대가 퇴각하는 것을 패주로 잘못 판단하고 1월 7일에 부대를 공주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이로써 김준룡 부대는 감사가 지휘하는 본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남한산성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근왕병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근왕병의 광교산 승첩은 병자호란 발발 이래 조선군 측이 거둔 승리로는 최초이자 최대의 것이었다. 이것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1월 28일에 김화 백동에서 거둔 승리와 함께 병자호란의 2대 승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청 태종의 매부로서 아끼는 명장수였다. 따라서 양굴리가 죽고 패전한 것은 청나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한 때 이 승전 소식은 남한산성으로 전해져 인심을 안정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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