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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유서분재기부남재왕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434
한자 南誾遺書分財記附南在王旨
영어음역 Nam Eun Yuseo Bunjaegibu Nam Jae Wangji
영어의미역 Document Transferring Properties of Nam Eun and Royal Decree Document for Nam Ja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분재기|왕지
관련인물 남은(南誾)[1354~1398]|남재(南在)[1351~1419]
용도 사문서 및 관공문
발급자 국왕|남은(南誾)[1354~1398]
수급자 남은(南誾)[1354~1398] 자손|남재(南在)[1351~1419]
발급일시 1398년연표보기|1415년연표보기
발급처 조정|한성부|남은(南誾)[1354~1398]
소장처 의령남씨 문중
소장처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173호
문화재 지정일 1993년 9월 10일연표보기

[정의]

경기도 용인시의 의령남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전기 남은·남재 관련 고문서.

[개설]

「남은유서분재기부남재왕지(南誾遺書分財記附南在王旨)」는 조선의 건국공신인 남은(南誾)[1354~1398]의 재산 상속문서인 분재기(分財記) 형식의 유서 한 점과 남재(南在)[1351~1419]에게 내려진 왕지(王旨) 한 점을 말한다. 남은은 조선을 건국할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인 의성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태조 7)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석의 편에 가담하였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남재는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고, 아우 남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96년(태조 5)에 도병마사로서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아우 남은은 살해되었으나 남재는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그후 태종 즉위년인 1400년에 의령부원군으로 임명되고, 1416년(태종 16)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형태]

남은 유서는 총 35행으로, 초서체로 기록되었다. 남재 왕지는 총 11행으로 4~5자의 초서체로 기록되었으며, 크기는 가로 85.7㎝, 세로 23㎝이다. 두 점 모두 필사본이며, 낱장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구성/내용]

남은 유서: 남은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왕세자 이방석의 편에 가담했다가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에 대비하여 집안의 제반사를 자손들에게 부탁하는 유서이다. 자신의 생사에 대한 기약이 어려워지자 자손들과 집안일 등을 걱정하며 재산을 골고루 나누고, 전답과 노비를 후대까지 보장하며, 조상의 훈업을 생각하여 행동을 조심하고 조상의 제사와 하사품인 금·은대와 은병, 채옥장 등을 모두 장손에게 전해주는 한편, 후손이 없을 경우 양자로 대를 이으라는 내용이다.

문서 말미에 재주(財主) 부수서(父手書) 개국공신 남은의 수결(手決) 및, 모(母) 가순택주(嘉順宅主) 김씨의 도서(圖書, 도장)와 보증, 형 남재의 수결, 7촌 숙부 남□의 수결, 9촌 조카 함부림의 수결, 9촌 조카 박양의 수결 등이 있다. 전해 오는 과정에서 자손의 집에서 전수되지 못하고 형인 남재의 후손 집에 전해지게 되었다.

남재 왕지: 1415년(태종 15) 9월 21일 남재에게 순충분의동덕개국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세자부(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 大匡輔國 崇綠大夫 宜寧府院君 修文殿大提學 世子傅)의 관직을 내리는 왕지이다.

[의의와 평가]

남은 유서는 조선 초기 사가의 재산 상속문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록 후대에 필사되었지만, 원본에 충실하여 자료적인 가치가 높다. 남재 왕지는 모본(摹本)이기는 하지만, 조선 초기 관제(官制)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