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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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泳煥墓 |
영어음역 | Min Yeonghwan Myo |
영어의미역 | Tomb of Min Yeongh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7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인영 |
성격 | 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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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원형봉토분 |
건립시기/일시 | 1905년![]() |
관련인물 | 이승만 |
높이 | 2m |
지름 | 6.5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7 |
소유자 | 여흥민씨 종중 |
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18호 |
문화재 지정일 | 1974년 7월 10일![]() |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는 조선 말기 문신 민영환의 묘.
[개설]
민영환(閔泳煥)[1861~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이다. 민영환은 빈번한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더불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에 나아가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변천]
민영환은 순국 후 선향인 용인에서 장례를 지낸 뒤, 일제강점기 내내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봉분 없이 평장되어 있었다. 해방이 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길가에 방치되었던 민영환의 묘는 지금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그때가 1959년이다.
[형태]
민영환 선생의 묘역은 200여 평에 이르고, 묘 입구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원형으로 된 봉분은 높이가 2m, 지름이 6.5m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을 비롯하여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1좌가 있다. 봉분 뒤쪽으로 60m 정도의 곡담이 둘러처져 있고, 묘소 아래쪽에는 계단석이 설치되어 있다.
[금석문]
묘비에는 “계정 민충정공 영환지묘(桂庭閔忠正公泳煥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신도비의 전액은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있을 때 쓴 것으로 “대한민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의정대신 충정공민영환 신도비명(大韓民國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議政大臣 忠正公閔泳煥 神道碑銘)”이라고 제액(題額)되어 있다.
비문은 신석호(申奭鎬) 당시 국사편찬위원이 짓고, 글씨는 경기도에서 촉탁한 남봉우(南鳳祐)가 썼다. 신도비 상단에는 민영환 선생의 육필 유서가 새겨져 있다.